「人間의 마음이란 마치 말뚝에 긴 밧줄로 매어있는 짐승과 같아서 그 말뚝주위를 돌고 돌지만 결코 달아날 수 없다. 그처럼 마음은 몸속의 「쁘라나(氣)」를 돌고 돌지만 몸을 떠나지는 못한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의 힘은 마음에 잠기고 다시 「쁘라나」에 흡수되고 그 「쁘라나」는 빛으로 밝혀진다. 그 빛을 「진리」라 부르고 나는 그것의 실체를 찾기 위해 이 세상에 있다」. 「모든 存在의 근원에는 스며있는 영혼이 있다. 그 미묘한 힘에 대한 믿음은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물 한그릇에 소금을 한줌 넣는다. 그 다음에 물 맛을 보라. 그렇게 모든 것에 스며있는 것이 있다. 한 영혼도 이 물그릇에 녹아 버린 소금과 같은 것이다.」「그 영혼을 느끼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이 있다. 예를들어 누구의 눈을 가리고 외딴 곳으로 데리고 갔다고 가정하자. 혼자 남겨진 그는 눈가리개를 풀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기 저기 돌아다닐 것이다. 결국은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동기나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황야에서 길을 잃고 헤매이는 우리가 찾고 만나야 되는 방법이다. 그 방법의 길이 오직 하나뿐인 진리다」 남루한 옷차림, 그러나 긴머리에 수염은 산타크로스와 비견될 만큼 멋진 「브라흐마차리」(독신으로 살며 영적인 修行을 하는 求道者)와 만나 며칠간을 함께 보냈다. 단순히 구도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자신의 전인생을 그 구도에 투척하여 사는 그의 동기의 또아리를 알고싶은 호기심으로 그와의 며칠간을 지내게 되었다. 본래 이 여정은 인디아를 타깃으로 삼아 봄베이, 하다라바드, 알라바드, 데리 주변과 모헨죠다로의 인더스江유역으로 방향을 정하고 가능하면 육로로 카투만두까지 가서 히말라야를 본다라는 여행계획 이었다. 50일 정도로 세운 여행기간이 1백20일 이상 소요된, 하루하루 지낼때마다 깊은 思考의 늪에 빠져 무엇인가 나를 천천히 옭아매고 껍질을 씌우는 것 같은 긴장이 계속된 나의 印度行은 계획의 중간에 만난 「사람」들이 몇번이나 나를 묶어 놓았다. 벌써 몇번의 유적탐험으로 혼자 떠나는 방법이 꽤 익숙해 있었고 또한 여행경비가 하루 먹고 자는데 20불 정도였으므로 오래머문 것이 가능했던 여정이었다. 하루 5불정도의 YWCA호텔방을 나이를 숨기고 단지 국제학생증 하나로 운좋게 잡은 것도 행운이었고…. 나의 印度行의 시작은 봄베이에서 「사람」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어 사람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 거렸다. 어느나라를 가든지 3~4일이면 소위 그나라의 분위기를 알게 되던 내 여행감각도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결국 인도를 떠날 때 까지도 불가사의로 미해결의 신비로 오래 풀리지 않는 아니 처음부터 이해가 불투명하고 암시같은 느낌으로만 「그것이 印度」라는 실체는 모호함에 가려 무슨 철학이나 종료, 정치, 사상과 같은 사유의 실타래가 그 땅에 발딛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보이고 여행자로서는 한줄기씩 구분지어 풀어야만 하는 그저 혼돈이었다. 몇 년전 두차례 1백일 정도의 유럽여행에서 한껏 누렸던 사람의 가치, 권리, 일과 놀이, 문화의 깊이, 달콤한 음악, 잔잔한 감동을 주는 그림과 무용, 입맛 들이기 시작한 치즈와 포도주같이 「삶의 질」을 알게 되었던 편리한 여행의 꿈이 內在된 유럽의 삶과 대칭을 그리며 인도는 모순덩어리 같기도 하고 쓸데없이 심오하기만 한 정신세계가 규율한 된것같은, 모호하고 막연한 그러나 뚜렷한 명암과 의미를 그리며 거대한 「사람들의 말」들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미술처럼….

여행 목적지로 선택한 나라를 갈때는 그 나라의 국적기를 타는 것이 여행자가 꿈꾸는 여행의 연장선의 시작이다. 기내에 들어서면서 그 나라의 민속의상을 입은 승무원의 인사를 받으면 이미 목적지에 대한 첫발을 딛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에어인디아의 기내에 들어서면서 상냥한 미소를 기대한 것은 꿈이었고 우루루 뛰어 다니는 국제선 승객들의 행태에 난감하였다.
국제선 비행기에 지정좌석이 없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밀려서 잡은 자리는 창가나 복도쪽이 아닌 자리였다. 「印度行의 시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점심 기내식을 좁은 식탁에 받아 놓고는 황당하였다. 넓은 종려나무 잎사귀 같은 쟁반에 부실한 「안남 米」를 담고 걸쭉한 카레를 뿌린, 먹는 사람의 시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그것은 정제되지 않고 배합이 되지않은 카레 원료가루여서 국제적으로 훈련이 잘된 내 입맛도 거부하였다. 더욱이 그것을 집어먹는 기구는 옵션으로 선택 신청하여야 했다. 그 음식을 점보기 국제선 승객들은 손으로 먹기 시작했다. 쪽쪽 손가락을 빨면서… 그때 나는 아마 청국장 전문식당에 겁없이 앉아 있는 미국사람의 형국이었을 것이다. 냄새도 고문의 한 방법이다. 봄베이 공항에 내리면서 시작된 話頭는 「계급」이었다. 사람의 등급, 사람의 조건, 핏줄, 혈통, 경악이었다. 공항버스를 타고 인도양을 마주한 서인도지역 최대해양 휴양지인 「주후」해변가까지 한시간 거리의 도로변 갈대숲에는 도저히 사람의 형태로는 볼 수 없는 「사람같은 것」들이 꼬물대고 있었다. 감동과 충격이 지나치면 어찌되는가를 나는 그때 느낄 수 있었다. 경악, 비감, 언어의 한계, 그저 카메라의 복원력에 의지한 기억… 우선 내 여행의 목적은 유적이었다. 봄베이 연안항구에서 배를 타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굴속의 彫像이 있는 엘레판타 섬이었다. 그러나 우선 이런 충격은 거너야 되리라. 모든 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므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므로. 「주후」해변가 방갈로에 방을 잡았고 이 여행은 너무 많은 수정작업을 요구했다. 그들은 갈대숲 사이사이에 낡은 천을 치고 우글대고 있었다.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없다. 사람들, 인간관계, 가족들, 삶, 일상, 먹이, 잠자리, 생식, 이렇게 토막을 내어서 밖에 따로 설명할 수 없는 조각난 삶들, 도저히 사람들의 삶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수만의 「사람떼」가 도시전체에 골목마다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지? 「수드라」였다. 인디아를 소개하는 관광객용 책장에는 보통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인 타지마할이 달밤에 은근스럽게 서 있다. 결국 그 사람들이 나에게 주었던 충격의 치유는 타지마할이 되었다. 인도는 그러하였다. 충격과 치유를 반복하는 인도의 이해를 위해서는 가장 교과서적인 지리와 역사를 읽지 않으면 불가능하고 이 얽힌 불가해한 나라의 혼동의 기저를 이해하는 것은 결국 그들의 생활처럼 사는 法인 종교에 이해없이는 더욱 불가능하였다. 한 나라가 지닌 정신사의 복잡함. 그 얽히고 얽힌 삶의 실타래 결국 역사의 눈으로 보아야 구분되는 은유와 비유같은 나라, 종교에 절여진 나라. 印度라는 말은 「흐르는 江이라는 의미를 지닌 삶의 터전」이란 뜻으로 인도?아리아의 말「신두」에서 파생 되었다. 중앙아시아와 남러시아의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아리아족이 BC2천년 경부터 인더스강 상류지역에 자리잡았다. 철기를 지닌 기마민족이었던 이들은 본래 이곳에 살던 드라비다족을 정복하고 농경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들은 고대 체제구성이 그러하듯 부족을 이루고 제사를 주제하는 우두머리 「라자」는 세습으로 정치?군사의 지도자로 당시 사회구조는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힘의 구분이 되던 주인과 노예사회이다. 인디아라는 호칭은 피르샤를 거치고 그리스로 전해지면서 「인디아」라 불리우는 중국에서는 信度라 표기 하였고 1949년에야 대외명을 인디아라 정한다. 아직도 자기들끼리는 「바라트」라고 부른다.

기원이나 역사를 탐색하는 일은 대개의 경우 뚜렷한 결과를 두고 생각하며 거슬러 유추하는 방법이 쉽다. 특히 유적지를 보고 그 건축물이 세워진 스토리를 사전에 알고 있었을 때 유적지 탐험이란 대사를 한번 읽은 희곡의 무대처럼 맑은 이해의 깊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누구나 그러하다.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는 여행, 단지 단순한 새로움에는 금새 싫증을 느낀다. 그러나 그 새로움이 아는 기쁨을 더할 때 그 즐거움은 더욱 커진다.
印度行의 시작은 스스로 정한 여행동기를 낱낱이 파헤쳐 보지 않고는 여정을 계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 印度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불가사의로 빠져버리는 印度의 실체. 얽히고 설킨 빛과 그림자의 나라, 印度의 실체를 밝히는 나의 방법은 印度의 종교라는 실타래를 잡고 그의 역사로 돌아서는 작업이었고 결국 이 방법은 흔쾌한 이해는 아니었으나 몰이해의 앙금을 남기지는 않았다. 나의 여행 수칙은 그러하였다. 「거치는 곳에 대하여 본것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라」. 비옥한 「갠지스」江 유역에 정착한 아리아人들은 江을 젖줄로 삼아 문명의 불을 밝히고 여느 고대부족국가 사회처럼 세습적 우두머리가 통치하며 전문적으로 제사를 다루는 제사장 그룹을 형성, 계급화되고 인도?힌두사회의 특유한 인간계급으로 견고한 관습을 쌓게 된다. 당시 아리아인들이 숭배하는 것은 하늘, 땅, 물, 비, 불등의 자연신들을 믿는 다신교사회로 이와같은 자연대상물을 찬미하는 내용의 呪文들이 창조되어 BC 1500년경 집대성되며 이는 「리그베다」를 암송하며 자연신들에 제사를 지내는 「브라만」계급이 힌두사회에서 권위를 지닌 계급으로 구분화되어 세습, 제도화 된다. 이 제도는 「카스트」라 불리우며 이말은 血統, 또는 家系라는 뜻의 포르투칼 말이다. 이는 개인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며 직업 또한 세습화 된다는 것이다. 이 「카스트」는 지금 까지 수천년이 지나며 3천여종으로 세분화된 인도 사회에 내재된 神經系이다. 현재 9억이 넘는 인도인구의 85%가 힌두교도인 사회이므로 정치에 우선하는 관습과 종교의례가 새활 깊숙이 스며있다. 성문화된 법률로는 존재하지 않는 「카스트」는 종교의례를 주관하는 「크샤트리아」 상공업 활동을 주업으로 하는 「바이샤」 노예계급인 「수드라」로 대별된다. 이들 거대한 네 개의 그룹을 나누는 진원지를 찾아 보려면 맞부딪히게 되는 것이 「힌두이즘」이다. 「힌두이즘」은 흔히 민족종교로 분류 되어진다.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민족과 함께 자생, 전승되어 가치체제가 다른 행위규범을 갖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수용되기 힘들고 문화적인 영향으로 단절이 심하다. 그래서 세계종교의 범주에는 가능하지 않는 어떤 질서, 생활화된 규범같은 종교, 「힌두이즘」은 다른 민족종교와 같은 開祖나 세계종교화 된 종교처럼 누구나 보편적인 이해가 되는 敎理나 敎意가 없는 영혼의 불멸, 업(業)과 윤회같은 「카스트」계급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사회의 질서같은 묘한 것이다. 종교적 요소가 강한 사회적 생활이 「카스트」로 전개되었기 때문으로 힌두이즘과 카스트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정리할 수 없는 명제처럼 모호하게 된다. 「카스트」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말 인도를 침입한 포루투칼인들이 자기들의 눈으로 인도사회의 계급과 같은 질서를 개념화한 것으로 당시 인도사회는 「바르나」라는 계급과 「짜띠」라는 제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카스트」로 불리우기 전 인도에는 「바르나」(색깔)라 불리우는 사회계급과 「짜띠」라는 계급제도가 있었다. 「바르나」의 구분은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라고 구분하였는데 이는 아리아인이 인도를 침략 통치하면서 본래 원주민들인 드라비다인에 대한 자기들의 우월감을 정립시키기 위해 피부빛깔이 하얀 순서로 순위를 정한 것이다. 한편 「짜띠」는 직업집단에 해당되며 서로를 같은 조상의 자손으로 인정하며 혼인과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는 계급집단이다. 이 집단은 그 직능을 세습적으로 계승해 나간다. 지금도「2천5백」여에 달하는 「짜띠」의 종족들이 어떤 형태로든 서로 횡적인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데 특히 이들의 사회, 경제적 응집력은 오늘날 인도내에서 가장 탄탄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이를테면 「바르나」의 종교의례적 네 개의 계급과 「짜띠」의 사회 경제적 기능이 제도화 질서화 된 것이 「카스트」이다. 그러하니 현재 인도의 사회계급제도의 역사적 시간대는 우리나라 李朝시대에 와 있는 셈이다. 양반의 아들과 상놈의 딸이 혼인을 못하듯이 양반이 상놈과 같은 밥상에서 음식을 못 먹듯이…. 인도의 사회구조에는 이런 극심한 차별이 존재하여 그래서 인권에 관한한 절대 후진국이다. 「수드라」그룹은 거의가 문맹자이며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다 죽으면 강으로 버려지는 삶의 과정을 겪는다. 하루 한줌의 호밀죽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자질구레한 인간의 희노애락과 같은 떨리는 지엽적 감정 따위가 보이지 않는다. 표정없는 얼굴들, 도저히 반응이 없는 그들에게서 나는 심한 분노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회의에 빠졌다. 생각이 빠져나간 듯한 사람의 형태. 도시의 골목, 변두리 갈대밭에 소리없이 죽은 듯이 누워있거난 쪼그려 앉아 표정없이 있는 인간들…. 그들에게 이 세상이란 무엇인지? 꿈은 꾸는지 안꾸는지? 눈 앞에서 보기에는 정신이 없어진 듯한 이 수많은 사람떼들. 자신이 인간임을 아는지? 살겠다고 발버둥 치든지, 소리를 지르든지, 좀 허우적대든지, 무슨 슬로모션비디오 조작하듯 느릿느릿 맥없이 서있는 것도 그러하고 힘겨운 듯 눕고, 앉아있는 빈곤함보다 더한 허구. 이것도 살아있는 사람의 형국인지, 돈을 달라고 구걸하는 몸짓도 없이 그냥 쳐다보기만 하는…. 인도를 여행하는 동안 어리럽게 일렁이며 다가오는 가난한 여행자에게 그들이 주었던 당황과 분개, 동정과 역겨움 이런 것들이 내가 느끼는 감각의 능력을 가끔 마비시켰고 기껏 찾아든 印度行이 무가치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의사소통이 되는 구도자와 만나 지내면서는 어쩌면 정신적으로 자멸될 것 같은 위기를 맛보았다. 「수드라」층의 사람들은 「브라만」의 피부에 손을 닿으면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엄청난 인간계급의 차이가 존재하는 땅. 「일곱살 정도의 계집아이를 미화 1백불이면 소유할 수 있는 나라」. 지금 이시간에도 수백만명의 기차지붕에 앉아 여행하고 있는 나라, 영어의 호텔(HOTEL)은 방과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아닌 식당을 뜻하는 곳. 그리고 감정의 종류가 五感이 아닌 九感, 즉 사랑 웃음 동정 영웅심 분노 두려움 메스꺼움 경이로움 평화로움으로 감정표현 범위와 기준이 확연히 다른 인도는 자기품에 들어온 여행자들의 소인배적인 편협한 지식이나 관념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가를 극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인도의 영상이 나로하여금 왜 이곳에 왔으며 무엇을 알게 될 것인가 하는 초조섞인 두려움을 갖게 했고 다름아닌 자유의지에 의한 내 여행 동기처럼 어느 주제를 따라 빠져 버릴 것 같은 미지에의 유혹을 강하게 던져왔다.

봄베이의 유적群은 「힌두이즘」의 신들이 가장 아름답게 살아있는 「엘레판타」섬과 인도를 다 주어도 셰익스피어와 바꾸지 않겠다는 오만한 식민주의자들의 기념비적 건축물인 「인도의 門」, 도시 전체에 흩어져 있는 힌두聖院, 「쟈한기드」미술관등으로 이곳들이 소위 관광명소이다.
그러나 힌두신자들의 화장터와 함께 인간이 사는 모습들이 내가 걸어가는 거리와 비례하면서 이곳저곳에 묻혀 있어서 보이는 것마다 충격으로 내앞에 다가왔다. 누워있는 황소둘레에 옹기종기 누워 서로 체온을 나누며 자는 사람들. 쇠똥을 눌러서 울타리에 다닥다닥 문양처럼 붙여놓고 땔감으로 저장해 두었다가 그 땔감의 연기가 온통 안개처럼 도시를 감싸면 거대한 명상을 통한 우주적 직관, 또는 초월적 신비주의자등으로 밖에는 표현되지 않는 정신세계 속에 사는 수만의 사람들이 술령거리기 시작하면서 저녁은 찾아온다. 해가 질무렵 골목마다 리듬섞인 주문이 음질나쁜 나팔꽃형태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드럼통속 나뭇가지에 불을 피우고 예배인 도자가 뿌리는 가루는 불꽃이 되고 피어오른다. 노래와 같은 주문을 박수를 치며 읊조리는 조무라기들부터 모여들고 그들은 춤을 춘다. 반짝 반짝 불꽃이 타오르며 즐거운 예배가 시작되었다. 하루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즐거운 종교, 이렇게 어릴 때부터 매일 해질무렵이면 신나는 리듬을 타고, 반짝이는 황홀한 불꽃을 보며 춤을 추면 그것이 정말 즐거움이 되어 핏속에 박힌 유전자처럼 하루의 질서안에서 반복되는 일상사가 되리라. 어느 사회주의자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고 했었다. 실지 자료에도 서민층과 천민층이 전체인구의 60%이상이라고 보고되고 있으므로 그 세사은 사실상 노동착취의 세상이다. 말이 통하는 구도자들 그룹과의 대화속에서도 부자가 되어 보겠다든가 권력자가 되고 싶다고 하는 절실한 것이 거이 없다. 하루하루 먹고 살고 다만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다 죽으면 내세에는 환상적인 영화를 누릴 것이라는 소망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나의 눈에는 비정상인 것 같은 의구심을 갖게했다. 길들인 사람들과 통치자, 9억이나 되는 인구의 절반이상의 맨발로 다닌다. 가난하여서도 그러하지만 세상의 어머니인 땅을 내 피부와 직접적으로 접촉케해 대지의 힘을 몸 속에 전한다는 그들 종교의가르침 때문이다. 기아에 허덕이면서도 소를 잡아먹지 않는 미욱함을 또 어떻게 이해하여야 되며, 결국 이런 모순덩어리의 사고의 빠른 전환을 위한 나의 자구책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아야 된다」였다. 예정된 나의 행로도 지체 되었지만 印度에의 이해는 곧 印度라는 거대한 思惟와 같은 올가미가 나를 씌울 것 같은 공포였다. 만나는 사람들중에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 모두 의미를 던지고 가끔은 가슴을 헤집는 「행복에의 초대」의 유혹을 받았다. 어쩌면 보고 듣는모든 것이 감수성에 어필하여 인간의 정신작용을 최대의 높이와 넓이로 이끄는 미묘한 힘을 느끼게 하며, 인도의 땅은 사람의 피부색과 똑같은 「땅의 색」이어서 놀랍고, 손에 들고 있는 빵조각을 도둑까마귀들이 순식간에 채가는 것은 보통이고…. 「소」님들이 어슬렁거리며 행차하는데 그 주위에서 쩔쩔매는 인간들이 그렇고, 이렇게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만나는 「사람」들이 주는 장애는 나를 매우 놀라게 하며 호기심, 긴장, 다시 피곤함으로 일련의 감정의 괘도를 그리게 하였다. 가까운 거리는 「릭샤」(자전거식 3륜차)를 타고, 조금 먼 거리는 「오토릭샤」(3륜 오토바이)를 이용해 「엘레판타」로 향했다. 그 섬은 봄베이에서 수시간동안 배를 타고 나가야 한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를 향한 인도서부의 관문인 봄베이는 식민의 눈물겨운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1534년 포르투칼 식민지였던 시기, 영국의 찰스2세와 결혼한 포르투칼 왕녀의 결혼 지참금으로 「봄베이」는 영국의 통치를 받는다.
17세기 대영제국이 그 마수를 뻗는 기점으로 개발한 봄베이에는 본래 가지고 있는 초라한 유적보다는 시기적으로 식민시대의 통치력의 위용으로 보이는 관청건물들이 위압적으로 서있다. 본래 어정쩡한 관료주의적 후진국에서 일수록 제일 큰 건물은 관청건물 들이다. 타깃은 엘레판타 섬으로가는 선착장은 바로 눈앞에 두 개의 건축물이 마주보고 서있다. 그 하나는 「인도의 문」이라 불리워지는 파리의 개선문 형식의 건축물로 1911년 영국의 조지5세 내외의 인도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식민의 産物이고 그 앞에는 금세기 최대의 건축이라는 호텔 「타지마할」이 인디아의 민족적 자존심을 내세우며 서있다. 이 건축물은 단지 호텔의 기능을 살려 지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민족주의 자본가의 「의미있는 표현」으로 완성되어진 것으로 무지막지하다 싶을 만큼 호화롭게 장식되어져 있다. 바닥에 전부 빨간 수제품 실크카펫을 깔고 향목과 상아의 장식으로 가구를 만들고 하얀 대리석으로 기둥을 세우고 욕실 세면대는 순금으로 되어있고 메뉴에 금가루를 뿌린 요리가 제공되는 상징적 건축물이다. 또한 이 건축물은 민족주의자인 호족출신 자본가가 식민의 울분을 터트리지 않고 내실을 쌓은 인도 민족주의의 상징이기도 하다. 궁핍과 호화, 극과 극, 최대의 한계. 선착장의 관광선은 5톤도 채 안되는 소형이었고 당연히 정시에 출발하지 않았다. 엘레판타 섬은 선착장이 간만의 차이를 따라 이용이 불가능하여 작은 배로 다시 옮겨 기슭에 닿았다. 「알레판타」는 거대한 돌로 된 코끼리형상 이었다. 「힌두이즘」의 신상숭배 사상과 돌산에 사원을 조영하는 것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거대한 돌산을 파고 들어 이음새없는 완전한 모양새를 만드는 작업이어서 또한 석질이 단단함으로 하여 얼마나 힘든 과정이었는가를 쉬 느끼게 된다. 단지 만드는 것이 아닌 조형물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 결국 믿음이 돈독한 장인들이 모여 오랫동안 이룬 것이다. 한가지 일에 대한 집중을 가진 사람들이 오래하는 일, 전력 투구하는 그들의 땀의 진원은 믿음에서 시작하는 것을 나의 유적탐험에서 자주 보았듯이…. 엘레판타의 힌두사원은 인도대륙을 마주보는 방향으로 「힌두이즘」 주신이 되는「시바」「비시누」「부라흐마」, 세 개의 모습이 양각으로 볼륨감 있게 새겨져 있다. 석굴을 파고 들어가면 전체적으로 하나의 완벽한 구조를 이루는데 예배장소, 화장실, 목욕실, 휴게실, 예배대상이 되는 신들의 彫像이 구조적으로 대별되어 조영 되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사원을 육지와 동떨어진 바다 가운데 섬에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교도들의 파괴를 피한 것이었는지! 「힌두이즘」의 신상숭배는 믿는 이들의 인식을 보편화 하는, 예배대상으로서 불교의 영향을 받는다. 다신교적 「힌두이즘」의 신들은 자연현상을 인격화한 신뿐만아니라 동물의 속성을 신격화 하기도 한다. 묘한 「힌두이즘」의 「교의」와 비슷한 믿음이 옛부터 인도의 토착민 사이에 死者의 혼이 동물이나 식물로 전생한다는 「에니미즘」이 널리 퍼져 있다가 「브라흐마나」시대의 윤회사상의 영향으로 굳어진다. 이는 인간의 전세에서의 행위결과에 의한 창조, 파멸, 재생의 과정을 영원히 되풀이 한다는 것으로 「카스트」의 질서가 되고 「수드라」등 천민계급은 「다음단계」의 높은 「카스트」로 재생을 위해서는 현세의 의무를 꼭 지켜야 한다는 「도그마」인 셈인데, 「힌두이즘」은 결굴 혈통우위를 노린 기득권자들이 제도장치가 아닐까?
석굴내부 습도가 있는 찬공기가 주위를 감싸고 신들의 표상은 썩 인간적인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힌두이즘」의 주신들은 반드시 배필이 있으며 각기 다른 所業을 지닌다. 따라서 인도의 세시기를 떠들썩 하게 하는 축제는 이들 신에게 바쳐지는 제사인 셈으로 사회 정황에 따라 교도들이 원하는 여론에 따른 그 신들의 축제는 매년 그 열기가 다르다. 많은 신들 가운데 「힌두이즘」을 대표하는 추종자가 많고 적음으로 구분한 이대신은 「시바」신과 「비슈누」파로 나뉘어 진다. 이 이대신의 숭배는 「힌두이즘」초기부터 세력이 확립된 것은 아니다. 각 신이 갖는 속성을 찬미한 시가 대중들에게 전파, 대중화 되고, 아리안 족의 침입으로 지배를 받게되는 원주민들의 정서에 맞는 토속신앙이 점차적으로 새롭게 신격화 되면서이다. 「비슈누」신의 프로필을 살펴보면 성품은 온화하고 숭배하는 자들의 심신의 단계에 따라 은총을 내린다. 부인은「라끄슈마」여신, 「바이꾼따」천상에 거주하고 「나라야나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여러 가지 무기를 잘 다루는 손에 활이나 연꽃등을 들고 다닌다. 금날개를 가진 새를 타고 날아 다니고 원시의 바다에서는 일곱머리를 가진 용에 몸을 눕혀 명상을 한다. 세상의 구제를 위하여 애쓰며 열가지의 화신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도 있다. 거북이, 산돼지, 사람얼굴을 가진 사자, 난쟁이, 도끼를 지닌 수행자가 흔히 힌두사원의 조상으로 표현된다. 그의 부인은 「라끄슈마」여신이다. 창조의 신으로 갠지스강의 성수로 깨끗하게 씻긴 부와 행운의 여신이다. 이들 부부는 대중적인 인기를 끈다. 「시바」신은 온화한 면모이다. 이 신은 그러나 파괴의 신으로 공포와 난폭함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는 네 개의 탈을 지니고 손에는 도끼 또는 순사슴을 지닌다. 그림속에서는 修行者로 표현되고 호랑이 가죽위에 앉아 긴머리를 길게 양어깨에 늘어 뜨린다. 그의 무기는 삼지창이며 목과 허리에는 뱀을 두른다. 이마 가운데는 제3의 눈이 붙어있고 그 눈은 언젠가 암흑에 빠진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섬광을 지니고 있다. 「시바」신의 자가용은 「하얀소」이다. 또한 우주의 창조와 파괴의 춤을 추는 무용의 왕이다. 그는 또한 생식의 신으로 이런 속성들이 사원의 「시바」신상에 구체적으로 표상화 되어있다. 그의 아내는 「우마」여신으로 히말라야의 딸, 즉 산신의 딸이다. 良妻의 신으로 여성들의 주요 숭배대상이다. 사자등에 걸터앉아 검은 물소의 머리로 나타나며 공물로서는 양과 같은 살아있는 재물을 좋아한다. 「시바」와 「우마」의 사이에 태어난 「가네이샤」신은 코끼리 머리를 하고 있다. 일을 순조롭게 이루도록 해주며 사업하는 사람들사이에 많은 숭배자가 있다. 이런 주요한 신들이외에도 「사라스바띠」학문과 기예의 신등, 주요 신격이외에도 각 지방에 따른 지역 신들이 존재한다. 엘레판타의 「시바」신의 경우는 그의 성격 그대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원형으로 몸체의 절반정도가 양각된 형태로 보통 예배대상이 보여주는 외경스런 표정이 아닌 편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다른 지역에서는 사원둘레 전부가 그의 부인과의 애무장면등 부분적으로 보면 왜설스러울 정도의 자극적인 체위로 조형되어 있다. 성스럽기 보다는 평범하고 인간적인 신들로부터 그를 믿는자들은 생활처럼 사랑법을 배우는 셈이다.
힌두이즘」의 신들은 참 인간적인 모습으로 믿는 이들에게 밀접하게 생활화 되어 있다. 삶과 죽음 사랑의 방법, 즐거운 삶의 방법등이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속에 살아있다. 결국 그들의 종교는 사는 방법이다. 국외자의 눈으로 볼 때 불투명하고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들도 그들에게는 일사의 일이다. 「오토릭샤」운전사의 권유로 힌두교도들의 화장터를 찾는 것은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 동기가 무지막지하게 충격을 받은 경우였다. 일부러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본 서운함, 멀리서부터 가솔린 타는 연기가 기둥처럼 피어오르고, 바람에 흩어졌다가 다시 피어오르고 처음 맡아보는 냄새를 느낄쯤 가까이엔 죽음들이 널려 있었다. 보통 「수드라」계층으로 여겨지는 시신들은 강가에 그냥 버려지기도 하고 길가에는 지게에 하얀 천으로 감싼 시신을 지고 가는 모습을 시내에서도 가끔 볼 수 있었다. 삶과 죽음이 흔한 이 세상, 생명, 삶, 도덕, 윤리, 부귀, 성취, 사랑, 슬픔, 먹이. 보통 사람들은 특별히 믿는 것이 없이 살다가도 관혼상제때는 격식을 차린다. 「힌두이즘」에서의 장례의식은 화장이다. 자기 몸을 태울 비용이 없는 자들도 많고, 태운 몸의 가루를 「갠지스」강물까지 옮겨줄 사람도 없는 죽음의 계급, 애써 냉정하게 불타는 사람을 보리라 하는 마음과 쓸데없는 충격을 받아서 뭘해 하는 마음이 내부에서 교전을 하는 동안 운전사는 누런 솜뭉치를 가져다 주었고, 카메라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권유했다. 솜으로 코를 막고 마섰다. 낮은 능선 키작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있는 사이사이에 그래도 옹기종기 모여든 「인간관계」들이 그룹을 이루고 사람들을 태우고 있었다. 그냥 눈물을 뚝뚝 흘리는 감정도 보이고 - 그런데 왜 악쓰는 통곡은 없는것인지. 아궁이를 만들고 장작을 깐 그 중간에 철판을 깔고 기름은 주정부가 무료로 공급한다던가. 시신은 가능하면 하얀포로 둘둘 두껍게 말아 기름을 충분히 적신후 둘레에 솜뭉치를 깔고 형형색색의 꽃을 뿌리고 나서 상주가 시신의 입부위에 불을 당겼다. 피어오르는 불꽃, 환해졌다가 사그라 들면서 사람형체는 검은 연기와 냄새를 피우며 사그라진다. 이곳 저곳 어림잡아도 수백의 구름이 내세를 위한 불놀이를 하고 있다. 수백의 전생을 기원하며 사그라지는 삶과 죽음, 이 설명 안되는 냄새, 화장터도 계급에 따라 다르다. 이곳은 「일반적」인간의 전생을 위한 마당이고 「계급」이 다른 인간들의 화장터는 또 다르다. 죽음의 계급, 부자의 화장은 또 다르다. 넓은 무대는 보통나무로 쌓고 시신을 둘러 싸서 향목과 향유를 흠뻑 적시고 꽃으로 몸을 덮는다. 얼굴을 열어 하늘을 보게하고 주위에 모여든 성장한 사람들의 주문속에 사제는 그의 입에 불을 당긴다. 강한 화력으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따라 타버린 꽃잎들이 하늘로 떠간다. 내세에 그는 이 세상보다 더 좋은 계급을 부여받는지? 울음이 없는 장례식장 사람들의 표정, 삶의 질의 차이가 지닌 괴리감, 세상사람들의 감정을 뚜렷이 구분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삶의 방법으로의 종교는 아닌가? 누구나 공유하고 공감하고 실천을 배워주는 상식의 종교. 화장터 순례는 며칠간의 침묵을 주었고, 그렇게 인도는 삶과 죽음의 먼거리에 있지 않음을 여행자에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가르쳐 주고 있었다. 호흡이 뚝 멈추면 가는 세상의 실감, 사람들이란 쉬 잊혀지며 산다. 그러나 삶의 저편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세를 믿는 사람들의 맹목과 같은 목숨던짐이 한때 이 지역의 역사를 흔들기도 하였고 전쟁에서는 광폭함을 드러내기도 했었다. 흙에서 와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삶, 빈손으로 돌아가는 세상, 그렇다 그들은 아마「허무주의」를 연습하며 살다 돌아가는 것이다. 계급의 허물을 벗으며….

봄베이를 떠나 「델리」까지 기차를 타기로 했다. 인도의 내부를 둘러보기에는 철도가 가장 편리한 방법이다. 열차의 종류도 다양하고 안정성 등을 고려하면 그러하다. 원자탄의 제조능력, 우주선개발에 참여하는 높은 기술수준, 극단적인 양면성을 지닌 인도의 내부, 그 동맥은 잘 깔려진 철도이다.
「오랑가바드」「우다이푸르」「아그라」를 기점으로 잡아 그 둘레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오랑가바드」를 기점으로 그 주위는 「아잔타」와 「엘로라」의 석굴사원이 산재한 곳으로 세계 최고의 석굴형태의 조형과 사원이 있는 곳이다. BC 10세기전 「힌두이즘」「자이나교」「불교」의 정교한 조형물들이 잘 보존 된 곳으로 이들 종교를 갖는 이들의 성지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사실 봄베이에 머무르면서 문화의 충격과 같은 극단적인 삶의 형태가 주는 혼란에는 조금씩 단련이 되어 있었고 주위의 성가심에도 조금은 익숙해져 있어 「무관심」을 위장한 마음의 방패로하여 나 자신도 점점 계급을 나누는 행적을 그리게 되었다. 그 「계급」은 열차의 객실등급에서 시작되었다. 여섯등급으로 나눠지는 인도의 열차계급은 「델리」를 기점으로 운행되는 「궁전열차」-호텔식 열차로 열차 한칸에 침실, 라운지, 화장실, 욕실, 부엌까지 구비된 옛날 「인도의 왕」의 전용열차-「관광객」용 상품으로 운용하는 그 열차의 승객에서부터 열차의 지붕위에 앉아 여행하는 승객까지 다양하다. 실지로 인도의 철도는 연장선의 길이가 세계에서 두 번째이며, 수송인원이 하루 1천만명, 지금 이시간에도 1백만명이상이 열차의 기붕에 앉아서 이동하고 있는 중이다. 인도에의 이해, 그 접근방식으로 종교의 갈래를 따라 이해하는 것은 옳은 것이었다. 「힌두이즘」을 추종하는 그룹이 82.7%, 이슬람교 11.2%, 기독교 2.6%, 불교, 시크교, 유태교, 자이나교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고 그들 종교그룹간에는 뚜렷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공동체를 형성한 특히 지역에 편중된 종교세력들 중에는 정치적 독립을 꿈꾸며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운동하는 그룹이 지금도 존재한다. 1등급 열차는 에어컨과 함께 넓은 소파가 있고, 버튼을 누르면 승무원이 달려와서 말끝마다 극존칭을 쓰며 대접이 극진했다. 늦은 저녁시간에 도착한 역사는 혼란스러웠다. 특히 철로를 사이에 두고 플랫폼과 역사, 역전 광장에는 열차를 기다리는 살람들이 길게 드러누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수많은 전상자들이 광장에 드러누운 듯한 장면을 연상시키며, 음침한 가로등과 함께 경계심을 부추겼다. 열차가 역사에 들어오는 경적과 함께 수천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서 지정좌석 없는 빈자리와 열차지붕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하면…. 이 시간은 경계와 긴장의 시간이었다. 배낭을 쥐고 귀중품은 목줄을 달아 가슴에 넣고, 현금은 신발속에 넣지 않으면 「내것」이 없어짐은 순식간의 일이다. 「인도」에서는 밤기차를 타지 말 것, 도착시간이 늦은 밤이면 경계할 것, 공식적인 사람들 이외에는 말을 걸지도 말고, 대꾸도 하지 말 것, 얼굴을 하얀 스카프로 감싸고 눈만 내논채 「도사」처럼 행동한 것은 참 괜찮은 연출이였다. 허겁지겁 역광장을 빠져 나오면 다시 하룻밤을 지낼 방을 잡는 일은 고된 일이다. 밤의 기온이 35°C . 역앞 여인숙 같은 건물속의 방이어도 요금이 각각 다르다. 선풍기 앞에 나무줄기로 엮은 발에 물을 적시면 습기섞인 찬바람이 나오는「시원한 방」은 추가로 몇 루피를 더 요구했고, 그래도 더위는 계속 잠을 쫓아 보내곤 하였다.
 
슬픔에서 기쁨으로의 전이가 「인터벌」없이 빈번하고 그 농도가 틀려지면 미쳐버린다던가? 인도는 그렇게 감정의 굴곡을 그리게 하였다. 인도 여행길에서의 무관심은 최고의 방편이다. 목적지에 닿고 감동을 얻고 다시 다른 감동을 위한 호기심은 불편하다. 향신료가 항상 지나친 음식, 입맛의 자극이란 가끔이 좋은 법이다. 차고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다. 갈증, 「캄파」콜라라고 쓰인 검은색 탄산음료를 하루에도 열병이 넘게 마셔서 항상 입안에 달착지근한 단맛이 남아 있어 불쾌했다. 이 여행은 나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인도에 발을 디디면서부터 시작된 의구심은 불규칙한 식사와 불편한 잠으로 인해 내 몸이 하루에 필요로 하는 열량과 휴식에 비례하면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잔타로 가는 길은 대부분 인도 중부 내륙이 그러하듯 사탕수수밭과 밀밭이 부석 부석한 대지 위에 덮여있었다. 마른 대지에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면 흙먼지를 뒤집어썼던 밀밭이 흔들리며 다시 흙먼지를 날리고, 건조하고 뜨거운 날씨 때문에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축 늘어져 맥빠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잔타로 들어가는 능선 전망대에서 본 「아잔타」는 스케일이 큰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확트인 전경이 시야를 압도하며 다가온다. 「아잔타」석굴암은 장려하였다. 숲과「와고라」강을 앞에두고 높이 70~80미터의 암벽의 병풍을 두룬 지형에 장장 1.5킬로미터에 달하는 29개의 석굴암이 연속적으로 조형되어 있다. 1819년 호랑이 사냥을 하러온 영국인에 의해 처음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이 석굴암들은 실로 1천년의 꿈을 깨며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아잔타 서굴암은 모두 29개이다. AD 2세기에서 BC 7세기까지 1천년간에 걸쳐 조형된 것으로 초기 인도불교의 흔적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활을 재생해 볼 수 있다. 고대 인도건축과 미술의 백미로, 하나 하나에 만든이의 손끝의 정성이 깃드려 있었다. 인도지역에서의 석굴사원들은 거의 종교적인 건립이유를 지닌다. BC 2세기의 「마우리아」시대에 처음 나타난 석굴사원은 초기의 힌두교도들에게 의해 처음 조형되기 시작했고 점차 불교도들에 의해 확대 발전되어 전체 인도「석굴사원」의 75%이상의 불교적 양식으로 세워지게 된다. 인도지역에 특히 「석굴」형식의 건축물이 발전하게 된 것은 기후와 건축재 등을 고려한 것으로 목재가 많지 않고 특히 기후풍토에 대한 내구성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암반을 이용한 석굴이 대규모 종교적 건축물로 적합하였고 이런 방식의 종교 건축물은 전통적 양식이 된다. 특히「석굴」의 조성은 매우 정교한 기술을 지닌 장인들에 의해 힘들게 만들어지며, 특히 신앙심과 결부된 성스러운 작업임을 쉽게 느낄수 있다. 자료에는 기원후 8세기경 인도인의 평균수명이 30세 안팎이라고 기록 되어 있어서 기술을 익히고 작업을 하다 죽은 장인들은 전 인생을 석굴파기에 소모한 셈이다. 더운 기후를 피하기 위한 서늘한 석굴에서의 수행도 「석굴」형태의 「암자」를 많이 조성한 이유가 되었다. 불교의 석굴사원은 「차이띠야」- 불당(佛堂) 형식과 「비하라」라 불리우는 승원(僧阮)형식으로 대별된다. 「차이띠야」는 예불의 대상인 본존을 모신 불당 또는 본당에 해당된다. 즉 초기 불교도 사이에서 예배의 대상인「수투파」(佛舍利塔)가 평지에도 특이한 구조로 세워졌다가 석굴을 파고 불당을 만들고 본존의 불사리탑도 바위를 깎고 조성하게 된다. 「비하라」는 수행자들이 머물며 수행하는 방을 갖춘 승원에 해당하는 석굴로 강원(講院)에 해당하는 넓은 공간을 갖추고 있다. 이후「치아띠야」와 「비하라」를 결합한 형식으로도 발전하게 된다.
인도의 석굴사원은 약 1천년전에 결쳐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는데, 아잔타의 석굴암은 완전한 형태를 지닌 완전한 모델인 셈이다

유적탐험의 기쁨이란 이런 것이다. 힘들고 고된 여정을 보상해 주듯 상상의 실체가 눈앞에서 현실화되고 그 실체를 만든 사람들의 손길을 직접 보는 것. 감동, 가슴에 젖어오는 화해의 파도, 땀흘린 여행자를 맞아주는 살아있는 사실들…. 입구에서부터 차례대로 건축된 아잔타 석굴암은 1번 석굴에서 29번 석굴까지 1000년의 시간을 거치며 조형된, 결국은 「영원한 미완성품」이다. 어디선가 본것같은 투박한 원색의 「벽화」들은 사실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꽃, 열매, 뺨이 도톰한 정겨운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당시 보통여인들의 장신구들, 노출이 심한 의상, 머리모양, 돌로 만든 문짝, 문틀, 기둥과 벽에 새겨진 세밀한 조상들, 암굴 깊이까지 햇살이 비쳐들도록 설계된 지혜로움. 명상하는 부처상은 쳐다보는 방향에 따라 은유의 미소를, 그리고 천년의 우수에 잠긴 표정으로 쳐다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서로 다른 표정이 떠오르게 한다. 지친 여행자의 눈에 비친 그의 표정은 따스하다. 그렇다 마음이다. 세상사람들은 모두 마음을 가누지 못해 번민에 쌓이고 번뇌에 젖고, 그 마음에 따라서 고된 삶의 항해이거나 평온한 항해가 되는 것을…. 마음에 따라가는 지친 몸뚱이들…. 삶과 늙음, 병듬, 죽음…. 「생각」과 「봄」「느낌」「정교함에 대한 경이」평범한 사람의 단계에서 존경받게 되게되는 사람의 모델이 되는 그의 마음. 새로움이 지나치면 사고(思考)는 단절된다. 제1번 석굴의 주실(主室)에 있는 회랑의 벽. 佛傳圖. 샤카족이 깨달은 「이」의 출가, 成道 이전 궁정생활의 무상을 느껴 사문유관(四門遊觀)하는 모습. 부처님의 일생을 재현, 보통사람들의 市場의 모습, 탁발하는 부처님의 모습이 생생하다. 제19굴(유려한 부조가 입구부분에 조형됨. 볼륨있는 몸체들, 굽타시대의 조각형, 정교한 채광창, 내부는 긴 말굽형 공간, 안쪽으로 「스투파」가 있고 예배공양처인 탑원(塔院)과 수행자들의 방으로 구성, 커다란 기둥, 그 기둥의 윗 부분이 보살부조, 어릴 적 할머니를 따라가서 처음 본 기억. 29번 석굴은 완전한 寺院의 형식이다. 중앙에 주불을 모시고 둘레에 벽을 따라 제자, 보살상들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僧院에 해당하는 작은 굴에는 수행자들이 켜놓은 기름등잔의 그을음이 뚜렷이 남아있고, 그들은 이 깊은 산중에서 한 세월을 보내며 깨닫기 위한 수행을 했으리라. 돌에 남겨지는 수행자들의 흔적, 그들의 마음은 어찌하여 이 길이었을까?

아잔타 석굴군을 하루종일 둘러보고 나는 심한 딜레마에 빠졌다. 둘러본 곳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얻고 나면 다음 여행타깃으로 연결되는 이유의 끈이 단절된 것이 그 원인이었다.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한 호기심, 다름아닌 불교가 탄생한 이 거대한 나라에서 지금은 왜 전 인구의 1%도 불교신자들이 없을까하는 그 호기심은 조금 진지한 유적탐험자로서 내 여행의 기조를 이루는 스스로의 확인이기도 하였다. 여행의 「걸음」을 위해 다시 역사의 실타래를 풀어야 한다. 그것은 「본 것은 이해한다.」라는 내 여행수칙을 지키려는 노력이었고 이 여행을 지탱하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짧은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난후에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는 이해의 한계와 같은 것이었다. 사실 유적탐험은 자료 조사없이 지나쳐 버린다면 아무런 뜻이 없다. 돌하나 부조 하나에서 시작되는 「스토리」의 양은 쉬 가늠할 수 없듯이…. 인도대륙의 역사속에는 수백의 문화와 그리고 상치된 종교, 수많은 왕국의 흥망을 이루며 이어왔다. 소도시가 모여 소국가를 이루고 중앙집권화된 대국으로 흡수되고, 부처님 탄생 당시의 인도의 2대 대국은 중부지역에 판도를 넓힌 「마가다」국과 북부지역의 「코살라」국 이었다. 이 2대 대국에 16여개의 소국가들이 소속되는 셈인데 부처가 태어난 곳은 북부 「코살라」국 소속 소국가인 「카필라바스트」국이다. 당시 기존 브라만 사제 집단에 대항한 새로운 구도자그룹「슈라마나」(沙門)들은 장발인 브라만 사제 집단을 비웃으며 머리를 깍고 숲속에서 자유롭게 명상을 하며 지낸다. 당시「슈라마나」의 지도자들은 「브라만」이 아니 계급으로 「붓다」를 포함, 일곱명이었다고 전한다. 「붓다(Buddha)」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말로 활짝 핀 꽃, 맑은 사람, 깨달은 사람의 뜻을 지닌다. 이 말은 자이나교에서도 쓰이는 말이다. 중국어로 음역하면서 불타로 우리에게 알려지나 초기에는 일반 수행자 모두를 지칭할 때 쓰였던 말이다. 이후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호칭으로 교유명사화 된 셈이다. 「카필라 바스투」국의 성주인 「숫도오다나」의 아들로 태어난 「사카무니 붓다」(석가족 출신 깨달은 자)는 29세에 성을 버리고 이후 6년간의 「슈라마나」방랑생활, 35세에 성도, 이후 45년간 가르침을 펴다가 80세에 「쿠시나가르」에서 입멸한다. 당시 「부처님」은 자신의 후계자를 따로 정하지 않았고 초기 불교는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인 「다르마」(法)와 자기자신에 의지하며 수행하는 바 「떠돌아 다니며 수행」하는 수행자들도 생겨난다.

본래 절은 두가지 원형이 있었다. 첫째는 「아란야」, 본래 숲속이란 뜻의 인도어가 「수행하기 적절한 곳」으로 변한다. 마을간의 거리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정했는데 그 이유는 초기 수행자들은 식사때가 되면 마을에 가서 밥을 얻어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소방울 소리가 들리듯 말듯한 마을과 떨어진 숲속을 택해「수행처」를 정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는 「비하라」,보통 정사(精舍)라는 중국어로 표기 되었는데 이는 여러사람이 모여 집단적인 수행을 하는 일종의 수도원이다. 이런「비하라」제도가 중국에 건너온 시기는 초기 탁발하고 수행만 하던 방법, 즉 인도 불교교단이 경제적 기반이 되던 탁발제도가 한참후에 중국식 자급영농체제를 도입하게 되는 셈인데 참선 수행과 노동을 겸한 집단 수도농장화의 형태로 변한다. 일종의 선농(禪農)일치 사상으로 계승되는데 白丈(AD 720~814)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굶는다」라는 수행규칙을 세우기도 한다. 「비하라」라는 본격적인 수도원과 같은 체제를 갖추고 「떠돌며 수행하는 이」들이 수도승 집단화가 되며 질서와 화합을 위한 계율이 정비되고 수도승이 되는 과정과 절차가 정해지게 된다. 그리고 구전에 의한「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인하기 위한 제1차경전 편찬회의를 갖는다. 이후 보수적 경향을 지닌 원로그룹과 진보적 경향을 가진 소장파그룹이 견해를 달리하고 두 그굽은 그후 제2차 경전편찬회의를 계기로 갈라서게 되었다. 「마우리야」왕조 제3대「아쇼카」와의 즉위,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의 「자비」를 정치의 이념으로 정하고 불교의 재정비?해외선교등 진흥에 앞섰다. 이후 AD128년 「카니시카」왕의 즉위, 그의 재위기간에 불교의 육성에 힘을써 눈부신 발전을 보인다. 그러나 BC 2세기 AD 2세기 사이에 브라만세력의 확산 그간 불교권이 지녔던 사회, 문화, 종교적 주권을 다시 장아하게 되었다. AD 1세기쯤 힌두교의 각성에 자극을 받은 불교평신도들의 신불교운동이 일어났고, 「힌두이즘」의 「박띠」신앙의 영향을 받아 「깨달은 이」라는 의미의 부처에서 「구원자」로서의 부처, 그리고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신적인 구도자상의 출현, 종래의 비구수행자들과 대립을 보인다. 이들 새로운 구도자들은 스스로 「마하야나」즉「적극적인 재가수행단」이라 불렀고 새로운 경전인 「반아경」「법화경」「화엄경」「정토3부경」등 많은 경전을 만들었다. AD 1세기중엽「나라르쥬나」가 본격적인「대승불교」운동을 전개, 남인도에서 서인도 북인도로 파급되어 간다. AD 3세기초 굽타왕조가 건립되면서 다시 융성기를 맞고 AD 5세기 초에는 세계최대의 대학인「나란다」불교대학이 설립 되었다. 그러나 AD 5세기말 굽타 왕조의 몰락으로 6세기 후반부터「힌두이즘」의 「쉬마」신앙이 침투하고 7세기말에는 불교학의 중심지였던「나란다」는 급속히「딴드라」(密敎)화 되어간다. 7세기에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이슬람」종교가 동쪽으로 나아가 이란, 중아시아, 아프카니스탄으로 확산되며「이슬람」왕국을 세우고 인도대륙도 986년부터 1027년까지 17회 이상 침공 당하며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동인도「벵갈」에 8세기 중엽, 「딴드라」연구의 종합대학인「비크라마쉴라」사원 대학이 세워졌는데 「이슬람」군에 의해 파괴되고 불교는 인도본토에서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불교 소멸의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이슬람」의 확산이다. 그 이전에 불교는 「힌두이즘」의 압력으로「밀교」화 되면서 서서히 침몰 돼버린다.
인도를 버린 불교는 이후 티벳으로 전해지고 고대 인도불교의 전통과 맥을 이으며 동쪽으로만 전파되는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게 되는 요인은 결국 몇가지로 함축될 수 밖에 없다. 당시 교역상대국인 로마제국의 몰락으로 교단후원자 그룹인 인도의 상업자본가들의 후원이 끊겼고 경제적 생산력이 없던「출가 수행자」들은 급속히 쇠퇴했다. 또한 초기 재가신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던「대승불교」운동은 후대에 활동 중심이 「출가 수행단」에 넘어가 버려 믿는 이들의 종교적 생활면은 무시되고 불교는 오직 심오한 철학이나 논리처럼 일종의 종교학파적 성격을 띠며 일상과 분리된다. 나의 인도 유적지 탐험은 인도라는 바다에 잠긴 거대한 종교가 일궈낸 흔적을 더듬는 작업과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거대한 유적을 만든「종교」에의 이해없이는 유추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인도는 확실하게 사람의 마음에 의문을 주는 마력을 지닌 곳이다. 그 옛날 여행자로 이 땅을 밟고 이 땅에 살아버린 순례자가 수 없이 많듯이,「왜」라는 의문사를 준 곳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 또는 올바른 이해가 필요했고 그것에 몰입한 끝은 진리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발걸음이 멈춰지게 하는 새로운 삶의 모티브를 주는 곳이었다. 종교처럼 산다는 것과 종교에 따르는 것, 종교에 빠지는 것, 인도의 사람들은 모두 이중 한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부처님은 그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데 당시 질병치료법의 방식을 택했다. 질병치료법이란 병든 환자의 증세, 병이 난 원인, 병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 그리고 병이 없는 상태를 병을 앓고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 치료방법은 다음 네 가지 진리를 통해 그 가능성을 제시한다. 처음은 인간상황의 특성을 고뇌와 좌절로 요약하는「苦」가 되는 것이다. 태어나고 늙어가고 병들고 죽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고,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고, 욕심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이 한계 사이에서 오는 고통,「苦」. 그 다음은 고뇌와 좌절이라는 이 병은 잘못된 소유욕, 감정이나 가치관도 흐르는 강과 같은 것인데 이것을 고정된 시각으로 보려고 하며 소유하려 할 때 필연화 되는 고통, 집착, 질문에 대한 해답이 새로운 질문이 되는 악순환이다. 이는 영혼의 방황이라 하는「輪廻」. 그 다음은 집착과 소유가 없는 상태, 고뇌와 좌절이라는 증세가 없어진 상태, 그것은 절대자유의 경지, 꺼져버렸다는「 」. 그러면「 」의 건강한 상태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치료법이 있는가. 그 구체적 방법으로의 길, 「道」. 여행길 나그네에게 그 길은 뚜렷한 암시였다.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그 건축이 이루어지게 된 동기가 종교적 이유였을 때 그 유적에 대한 이해와 비례하며 내뿜어지는 전기자장처럼 호기심은 커진다. 아잔타에서 매듭이 풀리지 않은 내 인도行은 이제 가속을 지닌 행적을 그리게 되었다. 힌두사원에 들를 때는 몸에 지닌 모든 가죽제품을 몸에 지니지 말든가 (그래서 가죽벨트는 배낭에 넣고 하얀천을 말아서 허리띠로 했다) 반드시 맨발이어야만 사원에 들어 갈 수 있다라는 관광객용 규칙에도 이미 적응하고 있었고, 재봉하지 않은 바지대신에 폭넓은 천으로 허리를 감싸는 방법도 이해를 하게 됨으로써 내 복장은 우스꽝스럽게 변모하고 있었다.
길어진 수염, 헝클어진 머리, 남루한 의복으로 점점 그들을 닮아가는 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기도 하였다. 특히 나를 괴롭히는 것은 점점 사람들이 아니라 일상에 필요한 물건들, 예를들어 비누와 샴푸, 치약 그리고 깨끗한 마실 물과 한번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싶다 또는 정갈한 음식을 먹고 싶다라는 욕구가 항상 머리에 남아 기회를 노리게 된 것이다. 말이 통한 것이 이유가 되어 몇시간을 함께 지내게 된「구도자」가 聖水라고 마시고 씻는 강물 저쪽에는 검은 소들이 파리떼를 좇느라 부산하고 나는 가끔 강물에 떠내려가는 시신을 보면서 그와의 몇시간의 대화동안 빠졌던 보석과 같은 의미의 말들, 「의지를 가져라. 그것은 무한의 가능성을 가르는 길이다…」를 떠올렸다. 이국어를 익히고 배우고 뜻을 아는 과정이 주는 함정들. 마차와 개조트럭 버스가 부딪친 현장 때문에 길이 막혔다. 그것은 사고였다. 나는 다섯시간을 그 사건 때문에 소비했다. 지체된 이유는 즉사한 그 송아지의 배상문제가 아닌 장례방법, 즉 화장으로 하느냐, 그냥 매장하느냐 였다. 그들의「윤회」 그리고 인과응보의 유전자, 보통사람들이 아는 것, 상식의 단계로는 파악할 수 없는 그들의 희구. 역앞 작은 광장에서 연극을 보았다. 배우들은 모두 남자였다. 나이어린 소년이 가짜 가슴을 부풀리고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여자역할을 한다. 전혀 얼굴형태가 느껴지지 않는 화장, 드럼소리가 투박하다. 드럼연주는 연극이 시작되면서 끝날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드럼 연주자는 지쳤다. 그리고 다른 연주자로 바뀌었다. 배우가 나직히 노래를 불렀다. 형형색색의 의상, 짙은 분장을 한 배우가 몸짓을 한다. 무대는 권투의 사각링과 같은 구조인데 사각의 링 대신에 허리 아랫부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노랑, 빨강, 감청색의 천이 감겨져 있고 코너마다 커다란 코코넛기름 호롱불이 걸려있다. 요가 형태의 체조동작, 사람의 몸짓이 주는 언어, 그림자가 보여주는 형태, 등장배우가 중요한 표현을 할 때마다 코너로 온다. 그곳은 호롱불이 밝힌 빛이 있고 그 불빛이 그림자로 보였던 배우의 얼굴과 충혈된 눈 떨리는 눈썹을 비췄다. 이 공연은 해질무렵 시작되어 아침이 올때까지 계속되는 오페라였고, 제목은「기쁨」이라 하였다.

봄베이를 기점으로 시작된 내 인도行의 행적은 이제 인도의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숱한 의미를 부여했던 낯선 것들에 대한 내 인식의 눈가림이 장막이 걷히듯 하나씩 벗겨지면서 북쪽의 사람들은 달라 보였다.
봄베이를 기점으로 남부지역 사람들의 갈색피부와 왜소한 체격, 남루하게 사는 모습들이 내 인도의 인상을 규정짔는 듯 했는데 지역을 건널 때마다 이는 잘못되었다는 생각으로 고정적인 관념을 자꾸 깨면서「모든 면에서의 다양함」그 자체가 인디아라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황토색 얼굴빛과 검은 곱슬머리의 사람들로부터 하얀 피부색의 금발머리의 사람들까지, 인도인이라는 표준을 세울 수 없는 다양한 피부색과 언어, 종교를 생활로 삼아 살아가는 인도인들. 북으로는 히말라야 산맥, 인도양, 벵갈만, 아라비아만의 바다로 둘러싸이고 서쪽의 사막지대, 동쪽의 삼림지대, 「데칸」고원에 넓게 퍼진 비옥한 대지와 같은 다양한 지형과 문화가 혼재되어 있다. 그후 종교라는 배경을 두고 지역적으로는 남부의 거대한 유적을 만든 힘 그래서 그곳은 뿌리깊은 공예와 무대예술의 토양을 키우고 사막지대에 살던 사람들은 자연과의 싸움속에서 살아가는 엄격한 생활양식을 세우고…, 인도는 배경과 배우가 뚜렷하게 바뀌는 연극무대가 되었다. 그동안의 내 행적의 1막은 힌두이즘 2막은 불교 그리고 「델리」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내 인도여행의 마지막 행적이 되는 3막은 이슬람의 세계였다. 내 유적탐험에서 인도땅에 우뚝 서 있는 유적군들이 세워진 이유가 내재된 세가지의 뿌리중의 하나, 인도에서의 이슬람은 뿌리깊은 거목이었다. 「델리」는 새로운 도시「뉴델리」와 「올드델리」로 확연히 구분된다. 숙소를「올드델리」지역에 정하였다. 인도 이슬람의 전성기인 무굴왕조의 市場이 그대로 남아서 사람들만 바뀐「알마스짇 아크바르」. 우리말로 풀면「大이슬람聖院」이다. 옆골목이 오래된 시장지역인 셈인데 본래 이슬람국가의 시장지역은 「이슬람성원」(영어로는「모스크」 아랍어로는「아스짇」)을 중심으로 올망졸망한 가게들이 모여있다. 고대 도시는 공통적으로 좁은골목으로 마차 두 대가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폭을 두고 한평이 될만한 규모의 가게들이 셀 수 없이 모여있다. 그러나 품목에 따른 구분이 잘 되어 있어서 금은보석 가게, 실크파는 가게, 도자기 가게들, 특히 생선가게를 제외하면 모든 물품등을 쌓은 가게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시장은 참 재미있는 곳이다. 여행자의 눈으로 보는 시장은 그나라 보통사람들의 삶을 볼 수 있는 일상의 무대여서 더욱 흥미롭다. 향료가게의 「마쌀라」「카데」포대가 형형색색의 원색으로 담겨있다. 카레의 종류가 1백50종류가 넘고 쌀밥에 쓰는 향료, 생선용, 고기용 향료 등으로 세분화 되고 그 종류를「믹스」하는 기술에 따라 맛종류는 엄청난 숫자로 불어난다. 따라서 인도식 맛의 감각을 표현하는 말의 숫자는 엄청나다. 우리의 김치에 들어가는 양념의 종류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풀뿌리, 나뭇잎, 흙까지 원재료가 되는 향신료는 한때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교역 품목이기도 하였고 소금하나로 맛을 정하던 유럽인들의 입맛을 정복하기도 하였다. 「바자」(시장)의 사회적 역할은 힌두이즘의 계급속에 보통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확대된다. 「모스크」를 중심으로 「바자」를 형성한 이슬람식 동선은「평등 평화」를 이념으로 내세워 힌두계급 사회 하층의 보통사람들을 개종시키며 민중의 종교로 빠르게 전파되어 나간다. 중세의 인디아는 이슬람왕국으로 덮여 또 다른 삶의 형태와 무늬를 수놓은 것이다.
「올드델리」의 변두리는 거미망처럼 좁은 골목이「바자」를 이으며 실핏줄처럼 퍼져 있다. 겨우 들어갈만한 대문이 있고 몇층 건물 위에서 보면은 바둑판처럼 집들이 깔려있는데 특이한 것은 다름아닌 지붕이 없는 집들이란 점이다.
좁은 공간 바닥을 흙과 모래로 응고시킨 마당, 한쪽구석에 유리창없이 흙으로 만든 서너평 규모의 상자같은 집. 넝쿨로 얽은 침상이 마당 곳곳에 널려있고 한쪽 구석에는 단지형 알루미늄 솥단지가 걸려 있다. 남자애들은 보통 하늘을 지붕삼아 자고 집속에는 부녀자들이 자는지…. 자연적 욕구인 배설물의 처리는 어떻게 할까. 쓸데없는 호기심은 며칠후 아침 강가에서 불쾌하게 풀렸다. 「올드델리」지역에 산재한 유적군들은 시기적으로는 인도이슬람왕조로 구분되는 무굴왕조시대의 유적群들이다. 배낭을 여인숙에 두고 다니는 것이 불안해서 지고 다니기도 하고 걸어서도 다녔다. 「모스크」주위에 사람들은 군집을 이루는「무슬림」(이슬람신자)이라고 여겨진다. 복잡한 생활규칙, 그것이 기준은 종교적 계율로 생활화 되거나 습관화 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힌두이즘」에서 신성시하는 소, 따라서 힌두교도들은 절대 먹지 않는 쇠고기, 이슬람신자들이 종교적 금기음식으로 삼는 돼지고기 등. 따라서 힌두교도들의 군집지역에서 쇠고기가 들어있는 음식을 찾는 것은 도저히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고「모스크」주위에서「돼지고기」요리 음식점은 있을 수가 없는 것처럼, 인도 여행길에서 입에 맞는 음식을 찾아 먹기란 짜증난 일이다. 이런 밑바탕을 이루는 구분들은 종교적 기초가 되어 인도사회를 분리하는 진원이 될 뿐만 아니라, 힌두이즘처럼 동일종교를 신봉하는 그룹인 경우에도「카스트」제도로 복잡화된다. 실지로 1902년 영국식민지 시대에「대기근」을 당했을때의 기록은 매우 흥미롭다. 「대기근」을 맞은 민중에게 영국정청이「구휼식당」을 개방했을 때 일이다. 여러 계급의 많은 빈민들이 이 식당에 모여들었다. 보통때라면 자기의「카스트」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카스트」의 질서에 절대적으로 위배되는 것이나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구름처럼 모여든 것이다. 그러나 얻어먹으러 온 처지의 상급「카스트」에 속하는「기아자」들은 「부정(不淨)카스트」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함으로써 입게 될「부정」이 식후 속죄의식으로 깨끗하게 씻을 수 있을 것인가를 점검한 후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을 제시한다. 우선 요리사는 고급「카스트」에 속하는 자를 쓸 것. 그리고 식사를 하는 커다란 강당에 선을 긋거나 표시를 하여 「카스트」에 따라 다른 구역에서 식사를 하게 할 것등이 그 조건이다. 아사(餓死)를 눈앞에 두고도 자기 소속의「카스트」의 계율을 지킬 뿐만아니라 용납되지 않을 때는 서슴지 않고 죽음을 택하려는 이들의 태도에 영국청은 페인트로 선을 그었다는 기록이다. 인도사람들이 이런 종파간의 응집력과 계율은 근대성문법보다도 상위에 있는 법인 것이다.

같은 계층의 사람들끼리 공동체 의식으로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공찬(供饌)의 풍습은 고대사회에서는 매우 흔한 일이다. 이른바, 동일 혈통간의 식사를 함께 하는 이 성찬공동체는 전형적인 의식으로 내려오는 유대교도 사이의 뚜렷한 전통이며, 인디아에서는 이런 관습에 종교금기에 따라 많은 요소가 가미되었다. 그래서 음식을 함께 할 수 있음은 곧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는 동류의식의 시작을 의미한다.
「유대교」에서 특별한 「선민의식」으로 함께 음식을 나누었던 결합의「음식공동체」가 무너진 것은 누구나 신분에 관계없이 우애를 맹세하고 신자가 되면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그리스도교」때문인데, 이는 이후 중세 유럽의 자유와 평등이 함축된 시민제도를 낳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인도는 아마 이 세상에서 영원한 계급질서를 지니고 있는 극단의 모순을 갖고 있는 나라일 것이다. 서서히 걷히는 인도라는 나라의 실체는 정신적인 삶, 물질적인 삶 그사이의 균형과 기본적으로 메워야 하는 기준이 모호한 혼돈의 사회였다. 최초의 통계가 되는 영국 식민지시대의 국세조사에 의하면 인종은 드라비다형, 몽골형, 인도아리아형, 터키형, 이란형, 몽골 드라비다형, 아리아 드라비다형 등으로 크게 대별된다. 그 줄기가 다시 수십종으로 세분화되고, 그 인종의 다양함은 사용하는 언어가 틀리다는 것을 뜻하는데 통용되는 언어의 종류가 1백가지가 된다는 사실이 입증한다. 오늘날 인도의 주민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로 크게 나뉘어 진다. 힌두교도가 이슬람 교도보다 3배나 많지만 이 비율은 통치한 왕조에 따라 매우 유동적이었다. 그리고 근대 인도의 분리가 힌두이즘과 이슬람의 분리로 인디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로 분할되었고 지금도 이 거대한 나라와 사람들은 종교가 기본을 이루는 새로운 나라를 위해 각기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문화의 바탕을 이루는 언어가 복잡성을 더한다. 통용하는 주요언어가 1백여종, 1백만명이상의 통용하는 언어만도 23종 등이다. 인종이나 언어가 복잡하다는 것은 인도가 곧 「대륙국가」이기 때문이라는 필연의 귀결일 수 있지 않을까. 말이 통한다는 것은 곧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외국어를 익히면서 자연스럽게 그 나라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 것처럼…. 그러나 인도에서의 길은 모호하다. 쓰이는 언어의 사용이 지역별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종족들이 모여 사는 지방별로, 도시별로 수많은 언어들이 잡탕으로 뒤섞여 통용되기 때문이다. 생각의 통일과 일치를 위한 의사소통수단이 여러갈래이기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들이 산재한다. 영화의「더빙」만 하더라도 상용분포가 높은 순서 「벵갈리」「비하리」「우리아」「펀잡」등 많게는 6천만명에서, 1천만명까지 사용하는 언어로 편집해야만 한다. 인도의 영화제작편 수는 세계 제일이다. 이런 언어구성중에 간신히 공용어에 준하는 것은「힌디」語가 되며 이보다 더욱 널리 보급되어 「생각의 통일」을 꾀하는 것은 다름아닌 1세기 반동안 수모의 대영제국통치하의 공용어였던 영어인 것이다. 모국어가 아닌….
올드델리」지역에는 인도 이슬람의 영광스런 유적이 산재해 있다. 시기적으로 「굽타」조로 대표되는 인도사회를 계승한 북인도의 라지프트 왕조(10~12세기)가 터키계 무슬림들에게 정복 되면서 엄격한 신분제도와 종교계율에 묶였던 인도 힌두사회는 「평등?평화」의 이념을 앞세운 이슬람에 흡수되면서 빠르게 이슬람적 사회로 변천한다. 이슬람 확산 이전의 힌두 계급사회가 대표하던 사회적인 약점들이 보완되면서 이후 3백년에 걸쳐 인도대륙의 절반을 넘는 지역을 통치하게 되는 인도의 이슬람 왕국은 터어키, 아프가니스탄 계열의「무슬림」들이다.
그들은 본래 유목생활을 하던 소박한 민족으로 같은「무슬림」이지만 일찍부터 격심한 종교투쟁에 익숙한「셈?이란」계통의「무슬림」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슬람의 교의(敎意)인「만민평등」사상은 터어키계 무슬림에게는 매우 순수한「청교도」와 같은 엄격함을 지니면서 실천에 옮겨진다. 형식화, 의례화된 아랍 무슬림과 우아한 페르시아 문화, 사변철학(思辨哲學)과 신학을 애호한 페르시아 무슬림의 지배아래 종교적 열정을 잃어가고 있던 서아시아지역 이슬람사회는 새로운 터어키「무슬림」들에 의해 청신한 기품으로 수준 높은 이슬람문화의 토양을 인도에 심으면서 발전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사회제도, 건축양식, 생활습관 등을 개조시키면서 힌두사회의 계급적 경직으로 굳어진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다. 이런 점이 인도를 지배하게된 이민족이 어느 민족이든지 인도의 전통적 사회에 동화되고 흡수된 것과는 다른 점이다. 이로써 힌두사회는 자기 고유문화와는 다른 가치를 지니고 보편적 성격을 지닌 높은 문화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실지로 계급의 힌두사회와 평등의 이슬람사회의 이질적 상대문화의 융합과 정은 엄청난 유혈의 희생을 남기며 진행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인도사회의 뚜렷한 이원성(二元性)을 보이며 오늘까지도 이어오는 골수깊은 상처가 된 것이다. 인도 이슬람왕국의 전성기격인 무굴왕조때에 꽃핀 유적들은「모스크」건립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라베스크」문양과 둥근 돔,「미나렛」(예배시간을 알리는 첨탑)으로 크게 구분되는「모스크」는 예배장소의 기능뿐만 아니라 함께 자리하는 화합의 장솔 당시 최상의 건축자재들, 빨간 흙벽돌과 하얀 대리석이 색조의 조화를 이루며 하나씩 세워진다. 올드델리 지역의 대표적 유적군은 델리 제왕조시대에 조영된「이슬람의 힘」이라는 이름의 大모스크를 중심으로 한 묘지, 학교들의 콤플렉스로 12세기 말에 조영을 시작하여 할지朝때 두차례 증축한 기록을 남긴다. 1천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황폐되어 콤플렉스 안에 조악한 신축 건물들이 세워져 있는등 유적보전에 소홀한 면을 보인다. 현재 뚜렷한 형태를 지니고 남아 있는 유적들은「쿠툽(아랍어로는 책이라는 뜻)미가렛」(모스크에 부속된 예배시간을 알리는 탑, 이곳에 목청 좋은 무앗진이 올라가서 예배시간을 알리는 사람이다)을 중심으로 알라딘의 미완성의 탑, 알라딘의 문, 그리고 묘궁들이 독특하게 남아있다. 「쿠툽미가렛」은 높이가 73m, 폭이 15m나 된다. 기능적으로는 「미나렛」이며「쿠툽 딘」이 델리 정복기념으로 1209년에 조영을 시작한 후 그의 후계자가 완공한 탑이다. 5층으로 된 이 미나렛은 나선형 돌계단이 시공되어 있어 원통처럼 되어 있다. 적갈색 돌로 이루어진 이 미나렛이 이슬람권에서 독특한 양식으로 평가받는 것은 다름아닌 외벽에 정교한「카빙」으로 이슬람의 성서인 「쿠란」의 전 章이 아름다운 서체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인도의 무슬림 왕조가 뿌리내리면서 그간 계급으로 묶인 구조적인 사회제도 형태가 바뀌면서 산만했던 집권체제가 중앙집권체제로 한층 정비되고 또 황제의 권한도 점차 고정된다. 인도 이슬람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한「무굴」왕조는 왕위계승권을 확실히 규정하고 행정제도상으로는 전국을 15개 주로 나누고 지방 행정조직을 정비하면서 체계적인 조직과 직능에 따라 질서를 잡는다. 즉 중앙정부 아래 주(洲), 현(縣), 군(郡) 그 아래 마을을 두는 종적인 행정제도가 인도역사상 처음으로 제도화되었다. 이런 제도는 인도의 고대로 내려온 귀족과 무사계급의 상류 계급사회를 타파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경우였다. 중국문화권에서 과거제를 도입, 문관 우위의 원칙을 철저히 실행해 온 것과 다르게 무관들이 우위를 세워 무예를 익힌 무사들을 등용하는 정책을 세우고 인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농민등 피지배계급의 노예를 화제의 공민 또는 백성으로 인정하는 등 제도적으로「계급」을 깨기 시작하였다. 특히 풍부한 물자를 생산해내고 주위의 여러 국가에게 밀리지 않는 막강한 군사력을 지녀 당시 주변 여러 나라와의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하여 부강함을 늘리게 된다. 부강한 경제력의 바탕은 곧 풍부한 문화유산을 만드는 힘이 된 것이다. 올드델리 지역의「무슬림왕조」의 건축물들의 특색은 하나같이 적갈색 돌로 조영 된 것이었다. 아침나절에 검은색이었던 것이 해가 뜨면서 점점 빨간 색으로 익어가고 해가 지면 검붉어지는 색의 변함. 「레드포트」성채를 둘러보면서 노예에서 왕이 되는「무굴」역사의 절묘한 전이를, 그리고 온갖 수식어 속에 잠든 이 왕국의 실체를 표상화한 건축물들을 둘러보면서 아마 꿈을 형상화한 왕들의 삶, 사람, 통치술, 생각의 끝, 아름다움의 끝은 없을것이라는 떠도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레드포트」의 성채안에서 해질 무렵에「빛과 소리」를 보고 들었다. 감동이었다. 아름다운 궁전을 무대로 하여 1백여m의 거리를 두고 수백석의 자리를 마련한다. 붉은 벽돌과 하얀 대리석, 둥근 돔과 아라베스크 문양의 창틀, 조용히 불이 켜진다. 몇 개의 현(弦)으로 된 인도악기의 공명을 깔고 라디오의 연속방송극 같은 대사가 커다란 음향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공주의 꿈을 실현해 주겠소. 그대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이루어지게 하겠소…』사랑의 말을 나누는 왕자와 비, 실제로 궁전을 바라보면서 불빛으로 시각을 유도하면서 사람들의 상상력을 최고조로 끌어들이면서 단지 원색의 조명을 창안에 비추며「소리」로 사람들을 기쁨과 초조와 감동에 떨게 하는 「빛과 소리」. 인도를 떠돌아다니면서 지치고 힘든 행로(行路)를 보상해주듯 이런 이벤트는 가난한 여행자들을 환상에 젖게 한다. 먼길을 떠나는 여행자들은 아마 이런 감동을 기대하는 연장선의 기대로 힘든 여정을 끌고 가는 것은 아닌지. 인도에서의 나의 여행 비망록의 분량은 점점 커지고 대개는 여행이 끝난 후의 가능한「감정의 반추」가 불가능하게, 그리고 소화되지 않는 충격들과 부딪치면서 생전처음 느끼는 이 미묘한 감정의 변색을 막기위해 나는 많은 분량의 비망(備忘)을 지니게 되었다. 삶에 대한 숙고를 해보는 방법으로의 떠남, 그 과정에 숨겨진 어떤 사는 방법의 암시, 인도땅에서 느껴지는 것들을 기록하고 싶다는, 그리고 처음 겪는 것을 무차별로 제시하는 숨가쁜「감정의 변화」를 주면서 절망과 비통, 극단의 상상을 초월하는 이땅은 가난한 여행자들, 특히 물질에 싫증난 서구의 여행자들을 묶어버리는 자력(磁力)을 지녀 정말 마술처럼「사는법」에 대한 암시를 뿜어내고 있었다.
봄베이를 시작으로 충격에서 시작된 인도의 내 발자취는 초기의 힌두이즘의 유적지, 불교의 유적지, 이제 이슬람의 유적지들로 넘나들며 커다란 삶의 범위와 같은 각기 뚜렷한 생활방식으로 구분된,「종교는 삶」그 자체임을 한참 생각하며 넉달째 인도를 떠돌고 있었다.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디면서부터 내 시각을 예리하게 파고들던「사는모습」들이 충격으로 하여 정체 모를 중압감과 함께 나를 조여들게 하는 낯선 감정들, 이를테면 삶의 질, 인간의 계급, 삶의 방법, 올바른 삶이란 무엇인가, 또는 삶을 인식하는 차이, 행복의 기준, 삶과 죽음등에 대한 익숙치않은 인식들, 도저히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그들의 사는 모습들, 그러나 남루한 의복과 헝클어진 머리칼과 땅색피부를 지닌 사람들의 맑은 눈빛, 그들이 사는 방법과 전생(前生), 현재의 삶, 그리고 사후(死後)의 영원한 삶을 모두 동일선상의 연장으로 보고 쉽게 살게하는 땅, 사람의 내면에 숨겨진 끝없는 가능성과 사고(思考)의 깊이에 같은「말」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나라, 인디아. 눈에 보이는 그땅의 껍질은 비관과 혼돈으로 시작되고, 그러나 조그만 호기심으로 눈길을 주거나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 시간을 끌수록 끝없는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땅. 선입견과 눈앞의 시각으로만「인도」를 바라다보면 인도를 느끼지 못한다. 누군가 또는 어떤「말」의 실체가 암시처럼 눈앞에 퍼뜩 보여지고 느껴질 것 같은 조바심, 그것은 무엇이였을까. 인식의 차이란 그런 것일까. 「없는 자들도 쉬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땅이 이 세상에는 있다」라는 확인되지 않는 믿음이 생겨나게 하는 이 땅. 인디아. GNP로 나라의 등급을 정하고 행복한 삶의 기준을 물질로 정하는 것은 큰 오산일 수 있다. 경제의 잣대로 세상을 보는 것도. 그간 돌아본 인도땅에서 살고 싶다라는 느낌을 받은 적도 있었다. 시골, 강을 눈앞에 둔 벽돌집, 여인숙,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정물같은 풍경속. 기쁨을 누리는 방법과 구원의 방법을 배우고 익히는 그룹에 끼어 성자들의 비수와 같은「말」을 들으며, 그곳에서 시간은 꿈과 같이 지났다. 무언가 내게 큰 힘을 주고 깨달음을 줄 것 같은 그 수많은 암시들. 강물은 흐르고 꽃잎을 떠나 보내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손끝에서 강물에 반사된 햇살이 다시 그들의 손끝으로 전해지면서 꽃잎이 나풀대며 강물에 흩어져 강의 줄기를 타고 흘러가는 꽃잎의 강, 왜 이땅은 먼길 떠난 여행자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는가. 이땅에서는 왜 힘센 자들의 생명과 약한자들의 생명의 무게가 꼭 같음을 자꾸 보여 주는가. 인도는 여행자에게 삶이란 명제를 던져 주고 생각하게 한다. 우여곡절의 내 인도行은 「아그라」를 종착으로 정하게 된다. 「어떤 방식을 택하지 않으면 이 땅에서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스스로의 위기감, 혼자 떠난 여행의 함정은 정확히 그런 것이다. 여행기간이 길어지면 감정이 무뎌지고 낯선 것 또한 일상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면 그만 돌아가야 한다. 돌아갈 곳이 있는 자들이 여행을 떠나는 것 처럼, 그동안 치열하게 몰두했던 것들, 내면에 잠재된 비교들, 살아가는 방법, 차이. 마음은 쉬 변하는 것이다. 단지 의지만이 곧은 심지가 될뿐…. 어리석은 사유, 희망이나 꿈들. 「아그라」와「파다푸르」를 목적지로 잡고 시기를 정했다. 「보름달 속의 타지마할」을 염두에 두고 익숙한 「솔로 여행자」로서의 인도行의 절정을 스스로 연출하며 때를 기다림은 즐겁다. 하루종일「뉴델리」시내 중심가를 얼씬거렸다. 히말라야 산맥을 건너온 민예품 장사꾼들이 몰려있는「티벳마켓」에서는「안녕하세요」라고 우리말을 할 것 같은 60년대 우리나라사람의 형국을 한 티벳사람들이 작은 소품에서부터 호랑이 가죽제품까지 내걸고「자유무역」하고 있었고….

방갈로는 멀리「타지마할」이 보이는 강건너에 있다. 방갈로(여인숙)는 여행자들을 위해 숲속에 수십채의 오두막집을 클럽하우스를 중심에 두고 나선형으로 세워진 건물이었다. 체크인 할 때 여권을 맡기고 방값 10불을 주니 열쇠와「해충방지용」이라는 하얀 D.D.T 가루같은 것을 한봉지 주었다. 문입구와 창가에 꼭 선을 그리듯이 뿌리라고 수염 하나는 참 멋진 문지기가 떼굴떼굴 잘도 굴러가는 영어로 친절히 설명한다. 나는 그 분말의 용도를 안다. 몸으로 기어다니는 징그러운 그것들이 싫어하는 냄새를 주성분으로 하는 것을. 아침새들의 날개짓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시골집 울타리에 공작새가 앉아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잇는 이 나라. 사람들이 참 많은 이나라는 동물들도 많다. 호랑이등 맹수사냥 패키지투어도 가능한 이 나라. 오늘 날씨는 무더울 거라고 이 지역 아침신문이 알려 주었고 오늘 신문의 톱은 「어느 지역에선가 그동안 출몰하며 30여명의 사람을 헤친 호랑이가 잡혔고 동물원에 전시될 예정이다」였다. 「아그라」시는 「야무나」강을 등뒤에 두고 있다. 인도 중부내륙의 여느 도시와는 다르게 거대한 수목들이 무성하고 성채를 중심으로 잘 조경된 나무들과 장미넝쿨등 키작은 여러해살이 꽃나무들이 뜨거운 햇살속에 무르익어 꽃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이곳에 내 인도행 타깃의 정점인, 사람들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중의 하나라고 느끼는「타지마할」이 있다. 이 건축물은 사용된 자재나 형식의 아름다움, 구조적인 독특함과 함께 지어진 동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게 하는「무덤」이 주는 일반적인 추모의 느낌이나 역사성이 아닌 그저 지순한 사랑의 스토리가 연상이 되는…. 인도 이슬람 당국의 대 영주인「아크바르」가 무굴왕조를 세우고 판도를 넓히고「아그라」에도 커다란 성채를 만든다. 「타지마할」은「아크바르」왕의 손자인「샤자한」이 그가 사랑하던 왕비「뭄타즈 마할」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기위해 지어지게 된다. 1640년부터 1652년까지 10여년간의 공사기간이 걸렸다. 10여년간 연속적인 추모의 마음을 지닌「건축자」의 의도가 하루 몇번씩 변하는 보통사람들의「마음」을 움직이게 하면서 지고하고 지순한「형태」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최상의 건축자재인 하얀 대리석과 숙련된 장인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의 소유자였던「왕의 뜻」이 담겨진 이 건축물은 이슬람 양식의 대표적인 형식에서 기능을 전환한 것이다. 이는「모스크」의 공간기능과 의미, 하루 다섯번씩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종교규범을 실행하는 장소이며「하나님의 집」이라고 인식되어진다. 종교적으로는 가장 아름다운 원형이 되는 교회건물의 외양과 형태를 무덤위에 세운 이채로운 경우인데 이슬람세계 건축물의 특징인 셈이다. 이는 이슬람식의 건축모델, 이를테면 성자나 통치자의 무덤을 만들고 그 무덤을 지방의 중심으로 하여 그위에「모스크」를 세우는 전통에 따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슬람세계의 묘지는 종교 규범상 대지 깊숙이 죽은 이를 메카방향으로 시선을 두게 하고 옆으로 눕힌 형태로 봉분이 없이 지상과 수평을 이루는 형식으로「흙에서 왔다 흙으로 돌아간다」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죽음의 기념」을 원하는 통치자 또는 성인을 따르는 그룹들은 흔적을 남겨 그들 종교의 가르침에는 「위배」되는 셈이다.

<아그라>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간 인도를 떠돌면서 아름답다라는 감정은 사치의 표현이라고 느낄 만큼 거리가 먼 사전 속의 문자였다. 그저 숨막히는 상식이 아닌 단지 계율과 같은 단지 계약 같은 어두운 암시로서만 느껴졌던 그저 모든 것이 모호하고 망연히 그럴 것이다. 모든 그럴 것 같다. 안개낀 사고...

골목마다 「무굴시대」의 음식임을 강조하는 작은 음식점들, 향기 짙은 향신료를 쓴 카레 종류의 음식들 매일 먹는 음식이 지루함을 깨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도 있다. 가끔 「매운 음식을 먹고 싶다」라는 것처럼 인도는 맛을 배워주고 있었다. 오래 지속되면 지루하나 가끔 자극을 원하는 음식처럼 화덕에 군 밀 빵인「짜빠띠」와 「양고기카레」, 그리고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달디단 케이크를 세트로 하는 식사. 울긋불긋 총천연색인 무굴식. 오늘 나는「무굴」식으로 먹고 찬란했던 영화 속의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을 만난다. 그리고 내 인도 행은 이제 끝내야 겠다는 생각, 이어 어떤 예감을 지니기 시작하였다.

예상대로「타지마할」은 서있었다. 하얗고 투명한 우윳빛 모형 같은 외벽 대리석, 건물 전체가 주는 것 같이 모형처럼 지상에 떠있는 것 같은 주위의 환경이 주는 지나치게 완벽하여 느껴지는 오만함 이를테면 하얀 대리석과 빨간 장미 정확한 풀잎의 색인 짙은 녹색으로 이루어진 관목사이에서 보는 하얀 대리석 건물 정면의 반사거울 같은 연못 타지마할을 원경에 고에서 어슬렁거리다 타지 마할을 만난다 이음새 없는 대리석 태라스 사각의 끝에 미나렛 지하에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왕비의 대리석관이 있다 석관 장식이 정교하다 아라베스크 의 형태를 대칭으로 잇고 홈을 파서 보석류를 끼워 박은 석관머리부분의 커다란 사파이어는 침략자에게 도난 당하고 외부에서 보면 3층 규모이나 시하에서 2,3층 돔이 이어진 공간형태, 지하에서 소리를 내면 청명한 공명으로 메아리가 길게 이어진다 종일 그곳에서 지냈다 낮에 보이는 타지마할 그러나 많은 이들이 타지마할은 밤에 그 중에서도 보름달이 떠오른 날 밤의 타지마할은 자연이 연출하는 최상의 아름다움이라 부른다. 이미 그 동안 지친 내 인도 행은 화해 또는 용서를 해야되는 여유 없는 긴장에 오래 있었고 오늘은 보름달이 뜨고 날씨도 청명하리라고 신문이 알려준다 타지마할로 들어가는 정문 앞에 쭈그려 앉아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달은 타지마할의 등허리를 타고 피어오를 것이다 둥근 돔과 미나렛의 실루엣이 뚜렷이 보이며 낮에 하얗게 빛나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 이 무대의 귀빈석은 타지마할을 1백여m 정면으로 둔 정문 앞 계단의 가운데 진지한 수 십명의 여행자들이 카메라의 눈을 고정시키고 벌써 몇 시간째 기다린다 사랑의 이야기를 담은 타지마할의 실루엣이 뚜렷하고 강을 건너온 보름달은 서서히 그 실루엣의 색도를 흐리게 하며 등을 타고 올라온다 아 또 다른 타지마할이 정원 연못 앞 수면에 역 대칭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달빛에 타지마할이 본래의 색인 은색으로 빛나며 땅위에 정중하게 서있고 불 위에서 또 하나의 타지마할이 거울에 비쳐 흔들렸다 보름달이 그린 타지마할 그 달빛을 맞은 나는 순식간에 치유되었다 이 땅이 나에게 충격과 모순으로 다가와 여러 종류의 처음 겪는 감정을 수없이 끌어내고 예상치 않은 온갖 잡동사니 느낌들 불편 분노 비애를 동시에 느끼게 했던 어지러운 감정의 굴복이 비속함과 우아함의 연결을 절망과 환희 갊과 죽음, 그것이다 시작과 끝을 다시 시작을...

나는 다시 인도 행을 생각치 않으리라 라는 생각.....

그곳은 단순한 즐거움을 지닌 휴식을 원하는 관광객에게는 턱없이 후회되는 선택이나 여행자로서 떠나는 이들에게는 아마 어디에서나 무엇을 보고 느끼며 자기 삶이 반추로서 일상을 변모하게 하는 충격을 주는 곳으로 선택 할만한 곳이다 ..인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