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을 좋아하는 山사람들에게 「왜 山을 오르는가?」라는 질문에 「山이 그곳에 있으니까」라는 대답이 통한다. 재즈의 名人 루이 암스트롱에게 어느 박식한 백인이 묻는다. 「선생, 재즈란 무엇이요?」라고, 루이 암스트롱이 이 질문에 씩 웃으며 답한다. 「당신이 재즈에 관한 질문을 할 처지라면 아마 들어도 느낌이 없을 거요」산과 재즈, 이런 비유들은 아마 여행에 대한 정의와 개념을 억지로 세우려고 애쓸 때 느끼는 기분과 흡사하다. 어디나 여행의 꿈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은 우선 희망이 있는 사회라고 보아도 된다. 여행이 생활의 부분으로 자리잡힌 진짜 보통사람이 사는 나라가 우리들이 꿈꾸는 소위 선진국이다. 앞선 사회일수록 여행은 인간성의 회복 또는 기본권리로 인식되고 여행의 빈도가 곧 삶의 질을 가늠하는 잣대로 쓰여지기도 한다. 나의 「지구촌 유적탐험」은 지난 78년 동남아 지역을 시작으로 한 나의 세계여행 중에서 고대문명의 발상지 주변과 유적지를 중심으로 돌아본 탐험기 이다. 색 바래기 시작하는 낡은 사진첩과 토막토막 思考의 연결이 되지 않은 備忘錄을 근거로 반추하는 작업이라 문장의 연결, 장소의 혼동, 교통편, 물가 특히 최근의 현지사정과는 다르게 표현될 수도 있겠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유적지를 찾아다니면서 영화로움이 기록된 역사와 황폐해버린 현장의 흔적 가끔은 지금까지 굳게 지녔던 상식에 매우 어긋나는 「逆轉의 새로운 思考」를 갖는 것. 이것이 「왜 보물찾기 같은 유적지 여행을 떠나는가」에 대한 자문자답이 된다. 특히 기독사관에서 본 세계사 교육을 받고 서방통신사들이 전하는 외신에 익숙한 나의 상식은 작은 충격에도 매우 흔들렸다. 가끔은 그 시대의 발전속도가 지금보다도 앞섰으며, 문명의 발전이 사람들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도 유적지에서 배운다. 어느 사막마을에서의 며칠 밤이 떠오른다. 하루종일 햇빛에 달구어진 야자수 잎으로 엮은 토담집, 안팎으로 물을 가득 뿌리고 방안 커다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 주던 베드윈(유목민)들, 사막에서는 가장 밝은 별들을 가까이 볼 수 있었다. 83년 6월 나의 첫 유적지 탐험은 나일江에서 시작되었다. 그 동안 나의 여행은 관광명소를 배경으로 증명사진도 찍고 뒷골목도 어슬렁거리면서 관광했었다. 역사가 시작된 곳, 먼 옛날 이야기로 출발하여 그 연장선상의 오늘을 생각하는 조금은 심각한 여행지로서 시작이었다.

 
목적지를 정하면 언뜻 연상되는 이미지, 심벌이 있다. 이집트하면 고대문명의 발상지, 피라미드, 스핑크스, 미이라, 도굴꾼, 황금마스크,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의 무대, 클레오파트라, 암살 당하는 사다트…. 이런 도막난 슬라이드 필름 같은 시간대를 뒤죽박죽 만드는 선입견 같은 것인데 아깝지만 떠나면서 제일먼저 버려야 되는 것들이 바로 이런 선입견들이다.
유적지 여행일수록 역사의 시차를 극복하기가 매우 힘든 일이다. 예를 들어 피라미드를 보고 만지고 들러보고 사진 찍고 나서 건축시기가 과학적 근거 있는 史料로 5천년전 이라고 인정될 때 그 시기에 아시아에 있는 동방의 등불, 한반도에서는 환웅할아버지와 곰 할머니가 연해하고 있었나 하는 상식이 전도되고 사고의 연결이 되지 않는 낭패를 맛본다. 그 해도 서울소식은 나라밖에서 더욱 소상히 알 수 있었다. 이집트를 타깃으로 정하고 도서관 목록에서 「이집트 여행안내」 편을 뒤지지 않고 「이집트」를 뽑은 것은 정말 실수였다. 이집트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를 대상으로 시작된 지역학으로 한때 아니라 여왕인 「클레오파트라」를 애인으로 삼은 대로마제국의 「시저」가 「역사학의 아버지」라 칭송했던 BC 5세기 그리스 철학자 히로도토스가 「이집트는 나일江의 선물이었다」라고 갈파한 그 「이집트」에 관한 책자는 서고의 한 섹터를 차지할 정도로 방대했다. 「나일강 물을 마셨던 자는 반드시 나일 강변으로 돌아온다」 「나일 강물이 적셔지는 곳은 모두 이집트이며 나일강 물을 마시고 사는 자는 모두 이집트인이다」 라고 고대 이집트인들은 국토와 국민의 개념을 정했다 라는 몇 구절만 읽고 이 거대한 곳에 대한 자료 찾기를 포기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유원(幽園)하고 방대한 역사를 읽음은 사실 무리다.

1799년 여름, 이집트를 침공한 나폴레옹의 군사들이 델타지역 로제타라는 하구(河口)근처에서 현무암으로 된 돌비석을 발굴해낸다. 비석에는 상형문자와 그 문자의 흘림, 그리스문자가 3단으로 새겨져 있었고, 언어학자 상폴리옹은 14년 간 연구 끝에 해독에 성공하고 이후 고대 이집트인들의 기록은 하나 둘 소생하게 되어 수천 년의 기록된 역사시대를 재생하는 나라. 이집트 그리고 위대한 나일江, 작은 세계지도를 펴보아도 긴江이 보인다. 길이가 5천7백60킬로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江이다. 지질시대부터 수 없이 되풀이 해온 범람은 정기적이었고 강물의 증감도 그 변화가 느릿느릿하여 엄청나고 거친 홍수가 아닌 밀물 썰물 같은 반복이었으므로 홍수는 재앙이 아닌 은혜였다. 범람할 때마다 기름진 흙을 날라 와 강 유역에 충적토의 층을 쌓아 주었다. 강물이 줄어들면 씨를 뿌리고 농경사회가 시작이 된다. BC 6000년 무렵의 일이다. 그들에게 나일江물과 사하라(사막)는 삶과 죽음으로 상징되며 가끔 내리는 비는 「나일江의 이슬」이라고 피라미드 텍스트「피라미드 내부 벽에 그리거나 새겨진 종교주술집」에 쓰여진다. 江은 교통은 대동맥이 되었고 파피루스(갈대잎)로 만든 작은 배가 떠다녔다.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수확 강변에 촌락을 이루고 서로모여 정기적인 江의 범람에 대비한 토목공사를 하게되며 자연과 대항할 우두머리가 생겨나고 파라오(큰집)라 불리우게 된다. 이때가 BC3500년 전이라고 출토된 자료에 기록되어 있다. BC3000년경에는 메네스라는 전설적인 왕이 출현하여 긴 나일江변의 통일국가를 이룬다. 흐르는 강물과 함께 흘러가는 세월, 시간에 대한 인식, 고대 이집트인들이 원단(元旦)에 대한 잣대를 만들었다. 나일江 범람의 수위가 최고조에 오를 때를 기준으로 잡고 해뜨기전 동쪽하늘에 「시리우스」별이 반짝일 때 를 해의 시작으로 눈금을 그린다. 1년은 12개월 1개월은 30일, 하루는 24시간, 낮과 밤은 각각 12시간씩 정한다. 1년은 3계절로 정한다. 즉 「강물이 넘치는 시기」「종자뿌리는 시기」「수확하는 시기」라 불리고 각 계절은 4개월로 이루어진다. 출토된 사료(史料)기록을 보면 「투탄카멘왕 재위5년 강물이 넘치는 시기, 제2월, 10일 밤10시」라고 뚜렷한 시제를 잡고 있다. 조용한 나일江의 정기적인 대홍수는 이집트인에게 삶을 규제하는 거대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집트의 국토는 주위의 천연요새가 지켜주었다. 동서로 불모의 사막 북쪽의 지중해 남쪽에는 폭포가 많아 통행이 불편함으로 강변국가는 외적의 침략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BC3100년 무렵 매의 신, 호루스를 신봉하는 종족이 지배권을 잡고 족장이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이 왕을 존칭하여 파라오(큰집)라 불렀다. 통일국가를 맞는 나일강의 이집트는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가 된다. 출토된 역사적 사료에 의하면 건국의 주인공은 나르메르 왕이다. 최초의 피라미드는 BC 3100~2700년 무렵에 세워진다. 기름진 델타평야인 멤피스에 수도를 정하고 파라오는 성채를 쌓아 「하얀 왕관의 성벽」이라고 이름짓는다. 현재 카이로 남서쪽에 폐허가 남아 있는데 진흙으로 만든 벽돌로 커다란 묘를 만들었다. 파라오의 신하들 황실가족을 위한 분묘인데 외형이 아랍인들이 사용하는 사다리모양의 벤치처럼 생겼기 때문 마스터바(계단) 분묘라고 부른다. 이것이 최초의 피라미드이며 많은 궁녀들도 순장되었다고 알려진다. 또 다른 형태의 피라미드는 초기의 계단식 형태에서 계단부분을 매몰한 형태의 굴절(屈折)피라미드인데 상반부와 하반부의 경사가 다른 형태이다. 세 번째 방추형 피라미드이다. 「기자」지역에 군(群)이루어 지금도 원형그대로 남아 있다. 쿠푸, 카프라, 멘카우라, 그의 왕비들의 피라미드라고 주인이 밝혀진다. BC 2600년이니 지금부터 4천5백년전의 일이다. 이 시기는 흔히 피라미드 왕조라고도 불리운다. 현재 이집트에는 60여 개의 형태가 다른 피라미드들이 전 지역에 걸쳐 산재하고 있다. 이런 피라미드들은 수도가 멤피스였을 때 대부분 건립되었고 시기적으로 중왕조(BC 2050~1800년) 수도를 테베(지금 지명으로는 룩소)에 옮기고 난 후에는 암굴을 깊이 파서 만든 분묘로 매장형식을 달리한다. 이는 피라미드 내부의 금은보화를 노린 도굴범들의 손길을 막기 위해서라고 알려진다. 「기자」의 피라미드 중 가장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많은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건물,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등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내부구조등으로 고대 유적지로는 특히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세계 역사의 보물이다. 피라미드의 네변은 정확히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르키고 있다. 헤로도투스의 연구에 의하면 10만의 일꾼이 매년 나일강의 범람시 농한기 3개월씩 20년 간 작업을 하였다고 하며 이는 현대 토목공학적 계산으로도 거의 접근한 수치다. 19세기 이집트학의 선구자라 일컫는 영국인 페트리의 보고에는 바닥면적 13에이커(7백65평방 피트) 높이 152미터, 한 변의 길이가 2백29미터, 평균 2.5톤의 석재 2백50만개가 소요되었다고 계산했다. 원래 피라미드는 단면에 대리석을 삼각형으로 잘라 황금색 도료를 채색되었다고 알려진다. 피라미드의 용도에 대해서도 여러 학설이 있었다. 아랍의 역사가들은 홍수의 「피난처」「식량창고」,영국의 철학자는 「천문관측소」, 그리스 철학자들은 「신전」이라고 각기 일리 있는 설득을 주장하나 무덤이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피라미드라 고하여 반드시 유체(미라)가 발견된 예는 없으며 가령 파라오의 미라가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묘라고 속단하기는 이르다. 왜냐하면 바티칸의 피터 성당 지하에 성자(聖者)의 유해가 모셔져 있지만 그 위에 세워진 성당은 묘가 아닌 틀림없는 성당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피라미드가 세워진 지역은 방대한 성전이 아니었을까. 실제 기록으로 당시 고대 이집인들의 사고방식으로 피라미드는 사후의 영원한 집이 아닌 「파라오의 승천을 위한 계단」으로 여겨 여러 가지 시설물을 갖추고 있었다. 나일강의 범람때 강가에 참배객을 위한 영접소가 있고 참배를 위한도로 재단 그리고 돌로 쌓은 울타리로 둘러 쌓인 피라미드 신전등으로 구성된 이를 태면 단지(Complex)형 신전인 셈이다.

이 신전 경내는 치외 법권지역과 같은 성역으로 그곳에는 제사장 농민 노예와 같은 계급이 있었으며 제사장들이 이를 관리하고 파라오를 위한 제사의식을 계승하여 3천년이상 지속되는 종정일치 파라오의 숭배사상이 곧 이집트 고대문화를 꽃피우는 제도적 장치가 된 것이다.

피라미드 내부는 반드시 안내원을 동반하라고 안내서에 쓰여 있었다. 가끔 오르다가 추락하는 경우도 있고 혼자 내부에 들어갔다가 미로에 빠진 겨우도 흔히 있다 한다. 피라미드는 대각선 3분의 1지점에 입구가 있다. 동굴에서 느끼는 외부와의 체감온도가 다르고 관광객을 위한 철제와 목재계단이 있어 피라미드 중심에 있는 현실까지 20여분이 걸렸다.
현실은 5평정도 크기 관을 놓아두었음직한 제단이 놓여 있다. 천장에 그을음과 낙서. 안내원이 준비해온 촛대에 불을 켜고 한곳으로 손을 옮기자 어디선가 바람줄기가 나오며 촛불을 끄고 말았다. 불가사의의 직접체험, 감동이라는 것은 적정한 탄력을 지닌 스프링처럼 지나치면 復原力을 잃어버린다. 「왜, 어떻게 하여」이런 의문사들을 유적지에서는 잠시 보류하여야 한다. 피라미드의 건축작업은 지금까지 여러 학설을 종합하면 파라오의 즉위 즉시 계획을 세웠다고 알려진다. 강변의 건설부지 선정 후 지하의 굴착부터 시작하는 작업과정이다. 피라미드의 속을 쌓는 석재는 부근에서 캐낸 석회암을 이용하고 외면을 쌓기 위한 질 좋은 석재는 나일강의 증수기(增水基)를 이용, 먼 곳에서 수송했다. 정확한 동서남북의 방위는 별을 관측함으로써 가능했으리라 여겨지는데 그 방법은 우선 북쪽하늘의 별 하나를 정해 떠오르는 위치와 사라지는 위치를 표시해서 얻은 각도를 등분하고, 이를 우선 북(北)이라는 결과를 얻게되고 이어 나머지 방위도 정했다. 또한 석재를 곧게 쌓기 위하여 수평측량이 중요한데 아마도 둑을 쌓아 물을 끌어들이고 수준선(水準線)을 그어 눈금으로 삼았으리라 여겨진다. 거대한 평균2.5톤의 석재를 하나하나 만들고 51도 51분 인 변의 경사각을 정확히 쌓은 것이 다시 불가사의에 빠지는 경우인데, 순전히 인력을 이용한 그 시대 배경으로는 국력을 건 대역사 였음이 분명하다. 차츰 높아지는 피라미드의 사면(四面)을 따라 비스듬히 발판용 언덕길을 나선형으로 쌓아 석재들을 지렛대 통나무 롤러등을 이용해 끌어 올리면 우선 계단모양의 피라미드가 이루어지고, 이후 꼭대기에서 계단부분을 메워 사면(四面)을 포장한다. 마무리공사가 위에서 아래로 진행되어 언덕길은 1단씩 없어지고 결국은 방추형 피라미드가 완성된다. 헤로도투스의 연구에도 「위에서 밑으로 완성되었다」고 전한다. 이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나일강의 범람을 막는 토목공사 기술적 노하우와 풍족한 양식, 튼튼한 노동력, 특히 파라오에 대한 거국적인 외경이 깔려있는데 어떤 학자의 보고서에 의하면 피라미드의 건설은 농한기의 농민구제사업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는 피라미드의 건축기간이 매년 4개월 20년간이라는 데서 근거한다. 흔히 생각대로 파라오가 국민들을 혹사해서 만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 태양신 숭배사상과 태양의 아들 파라오 신앙에 바탕을 둔 자연스런 모습으로 신인(神人)을 위해 봉사하는 뜻깊은 노동이었다. 그 시대의 종교신앙 사회인 요소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파라오에게 권력이 전부 집중되었지만 그 권력을 행사하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고 일반적인 정무(政務)는 재상과 관리들이 운영한 제도적 균형이 바로 그것이다. 피라미드 텍스트에는 「파라오의 아버지는 남자가 아니고 파라오의 어머니는 여자가 아니다」라는 구절이 있어 인간세계를 초월한 신(神)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피라미드 건축작업이란 누구나 참여하는 신앙을 위한 노동이었다.

해부학 책자에서 사람의 골격을 봤을 때의 신비함, 사고현장에서 생명을 잃은 유체를 보았을 경우의 충격, 그 사고가 일어나게 된 시간, 뒷이야기, 삶, 내세, 숙명. 자연의 힘 자체를 神으로 믿게되는 고대 이집트인에게 미지의 세계는 곧 내세였을 것이다. 수 천 년전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가슴을 조이는 일이다. 그들은 카이로의 중심가인 타흐리드(독립)광장 옆 박물관에 누워있다.
19세기 중반에 압바스 힐미에 세워진 이 박물관은 수천년 시간대를 오르내리는 시간여행을 떠나는 곳이다. 제18왕조인 아멘?호텝 4세와 2세를 알현하였다. 임금님은 깊은 잠에 빠져 계시다.

런던의 대영제국 박물관, 루불 박물관의 권위를 세워주는 전리품으로 고대 이집트 유물은 흩어지고 세계 유수의 고미술상이나 골동품의 최고가를 정하는 물건으로 운명을 맞은 이 유물들은 최근까지 후진국 군 출신 지도자의 전형으로 세계유명 인사들과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대통령의 귀빈 선물용으로 애용되기도 하였다. 그는 광장 사열대에서 암살되었다.

사막에서 발견된 미이라중 완벽한 것은 피부 근육 머리털, 부패하기 쉬운 뇌장, 체내기관, 신경계, 소화되지 않고 위 속에 남아 있는 곡식, 생선뼈, 육류가 그대로 남아있다. 신장 164cm. 장발 갈색머리카락, 직모(直毛), 타원형 얼굴, 여성, 돌로 만든 화장판(化粧板)에 색깔이 있는 공작석(孔雀石)을 갈아 눈가에 화장, 아이섀도, 화장의 천재 클레오파트라. 이렇게 思考의 연결이 되지 않은 시간여행은 경이와 신비함을 동반한다.

유물을 보면서 흔히 느끼게 되는 과학적 사고와 논리적 유추가 거의 불가능한 경우인데 이런 충격의 완충을 위해서 유물을 만나기 전후에 자료를 찾아 읽어두는 것이 좋다.

고대 이집트인은 내세(內世)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으로서, 장례방법

은 황무지 사막의 모래땅이나 그리고 조금 딱딱한 암상(岩床)에 구멍을 뚫고 묘를 만드는 것이었다. 극히 건조한 사막기후가 부패를 막아 천연적 미이라가 지금도 발견되는데 손과 발을 구부리고 자는 것처럼 조용히 누워있고 식량과 일상에 사용하던 물건들이 부장품으로 들어있다.

이들의 강한 내세관, 영원불멸과 같은 사상을 키워준 것은 환경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神인 태양, 태양의 아들 파라오, 「태양처럼 영원히」라는 수식어는 주문이었고, 끝없는 江. 기름진 들판, 끝없는 사막, 이런 변화없는 항상 일정한 세상에서 아침에 왔다가 저년에 돌아가는 태양, 해마다 되풀이 되는 대홍수, 뿌린 씨는 반드시 싹이 돋고 열매을 맺고, 아마 이런 것들이 재생(再生)의 관념을 뿌리내리게 한 것을 아닐까.

피라미드 텍스트에 그들의 신앙이 이렇게 묘사된다. 인간은 누구나 몸속에 「카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육체와는 별개다. 영혼, 기(氣) 또는 활력(活力)이란 개념인데 「카아」는 인간과 함께 태어나고 깃들어 있는 무형태의 분신(分身)이다. 인간이 죽어도 「카아」는 계속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육신을 떠나지 않는다. 인간이 죽으면 「카아 는 쉰다. 그리고 육체가 미이라로 있으면 언제인가 부활하고 다시 활동한다. 그래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는 신앙이 육신의 보존에 전력을 다하고 「혈묘」나 피라미드 같은 신분에 따른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묘는 그들에게 언젠가 부활의 때를 기다리는 집이다.

미이라 제조 풍습은 의학과 화학분야의 큰 발전을 이루는데, 파피루스 텍스트에는 체내의 기관, 심장의 중요성, 외상이나 골절, 탈구등 외과증상에 대한 예가 기술되고 진단 방법을 알려준다. 예를들어 체한 환자에게는 식사를 제한하는등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합리적이다.
또한 백발을 물들이는법, 화장하는 방법등이 기술되어 있는데 화장은 파라오등 황실가족과 신분이 높은 남녀귀족등 유행이 없으며 일반인들은 죽었을 때 필수의식으로 여겼다. 사용한 의약품과 화장품의 원료는 올리브油 피마자油 소금 명반(明礬)등이 있었고 빵을 상식하였다. 미이라의 제작과정은 일반적으로 죽은자의 뇌와 내장을 꺼내 항아리형 단지에 담아두고 사체는 수십일간 약물에 담가 두었다가 다시 건조시켜 방부제를 바르고 아마(亞麻)로 짠 커다란 붕대로 사체를 칭칭 묶는다. 이후 제례를 지내고 입관한다. 이후 묘혈에 담는다. 파라오의 경우 곁겹은 대리석등 석관(石棺)안에 삼나무 제질의 목관(木棺) 다시 내부에는 금관(金棺)으로 3겹으로 만들고 목관에는 죽은이의 생전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였다. 일반인의 경우 석관 목관 2겹인데 목관에는 죽은이의 생전의 얼굴 모습을 그려 원형그대로 발견된 미이라의 경우 죽은자의 생명이 있을 때 얼굴과 신분을 나타내는 의복을 입은 전신상이 있어 미이라의 신원은 쉬밝혀진다. 헤로도투스의 「이집트 연구」에서는 미이라 제조 방법이 더욱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제1의 방법은 제일 정중한 방법으로 유체의 머리부분은 콧구멍에 기구를 이용하여 뇌수를 꺼내며 몸통부위는 이티오피아石으로 만든 칼로 옆구리를 절개하여 내부 기관을 들어낸다. 그런 후 야자유(椰子油)로 세척하고 향유를 바르고 몰약 계피등으로 내부를 채우고 원래대로 기운 후 성기게 짠 수지(樹脂)를 적신 아마포(亞麻布)로 둘둘 말아둔다. 이후 70일이상 천연탄산소다에 넣어서 탈수하고 수지(樹脂)를 적신 아마포로 둘둘 만다. 꺼낸 장기는 특별한 항아리에 담아둔다. 제2의 방법은 기구를 이용하지 않고 몸통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관장기에 소유(梳油)를 넣어 뱃속에 가득 주입하여 새지 않도록 해 천연 탄산소다속에 넣었다가 일정기간이 지나면 꺼내 분해된 내용물을 흘러나오게 한다. 뼈와 가죽만 남은 유체를 아마포로 싸면 이 과정은 끝난다. 제3의 방법은 내부를 하제를 써서 씻어낸후 천연탄산소다에 담가두었다가 꺼내 아마포로 싼다. 영혼의 부활을 믿고 미이라 제조하는 풍습은 BC16세기 이후에는 한층 더 정교해진다. 미이라 제작후에 죽은자의 모습을 복사한 듯 한 마스크를 씌우기도 하는데 황실가족인 경우 황금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분묘와 미이라는 초기부터 끊임없는 도굴꾼의 타깃이 되기도 하여 미이라는 중세에 약품으로 알려져 비싸게 호가되며 미이라 발굴은 곧 횡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고, 침략자들의 전리품으로 인기가 있었다
1799년 여름이었다. 이집트를 침공한 나폴레옹의 군사 한사람이 델타지역에 있는 로제타 하구(河口) 근처에서 참호를 파다 검은 현무암으로 된 돌비석을 발견했다. 몇 명의 도공(圖工)들이 8권의 되는 분량의 이집트 지(誌)를 발간하고 언어학자인 장F. 샹폴리옹은 이를 토대로 14년간 연구 끝에 비문에 적힌 상형문자의 해독에 성공하고 5천년 역사의 실타래가 하나 둘 풀리기 시작했다.
이후 이탈리아 롯세리니, 프러시아 레프슈스 영국의 비트리등 연구가 계속되었고 이후 1세기 반만에 고대 이집트의 기록은 소생하게 되며 이집트학의 연구, 유적지 발굴등이 붐을 이루며 유럽에서는 이집트식 복장이 유행하기도 한다. 유물들은 고고학을 연구하는 자들에 의해 찬탈당하고 전리품으로 반출되기 시작한다. 역사학은 식민주의자들의 시녀로 날뛴다. 역사는 적히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히에로클리프」(돌에 새겨진 신성한 문자)라고 유럽인들이 부른 상형문자가 처음 사용된 것은 「나르메르」왕의 화장용 안료들을 으깨어 뭉개는 화장판(化粧板)이다. 신전에서 발굴된 이 화장판이 기념비적 건국비이다. 상형문자는 이후 나일강 유역의 갈대잎으로 만든 파피루스, 피라미드 텍스트에 사용된다. 상형문자는 물건의 형상을 본 뜬 것이다. 예를 들어 눈은 눈동자의 모양으로 그려 말의 의미를 표의(表意)문자화 한 것이다. 출토자료중 가장 오래된 「나르메르」왕의 화장판에는 「나르메르」왕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는데 당시의 말로 고기 (魚.나르) 와 이(蚤 메르)의 기호를 조립하여 만들었는데 이 경우 두 개의 기호는 형태에 관계없이 음(音)을 이용하는 표기법이다. 이렇게 표의(表意) 표음(表音)문자인 고안은 고유명사와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도 표현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달(月)과 성(城)을 기호화하면 「달성」이 되는데 그러나 표음문자의 최대의 결함인 동음이어서 同音異意語의 경우 혼란이 생긴다. 이 결함의 해소를 위한 것이 한정사(限定詞)인데 예를들어 필기도구 모양에 파피루스 족자를 이으면 「쓴다」라는 동사 또는 「책」이란 명사가 되며 사람의 형상을 이으면 서기(書記)라는 의미가 된다. 이 상형문자는 세로 가로, 방향에 관계없이 쓸 수 있고 특히 왼쪽으로부터 시작할 때는 생물의 모습을 모두 왼쪽으로 돌리고 오른쪽에서 시작할 때에는 모두 오른쪽으로 돌려 어디서부터 읽을 것인가를 알려준다. 이후 상형문자는 3천년이상 본래의 형태를 무너뜨리지 않고 계속 사용된는데 원형 그대로 사용한 민족은 이집트인 이외에는 없는 셈이다. 그들은 전통을 중시하는 매우 보수적 민족이며 상형문자는 곧 신의 말씀이라고 믿어 소중히 여긴 것으로 그들의 지혜의 신「도트」가 문자를 만들어 주었다고 믿었다. 또한 상형문자에 나오는 동물들은 소, 고양이, 악어, 매등이 상형문자화 되고 미이라로 만들어 지기도 하였는데 다른 농경사회와 마찬가지로 황소의 숭배사상도 강해 거룩한 짐승으로 숭배되고 파피루스 기록에는 황소의 힘과 번식력이 파라오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황소의 미이라가 분묘에서 별견되기도 한다. 파라오를 상징하는 동물은 황소를 비롯하여 매, 코브라등도 등장한다. 기념비, 묘비등에 사용된 상형문자는 중요한 기본 字가 600자, 세분하면 3천자가 되는 것으로, 갈대잎으로 만든 파피루스의 발명과 함께 서기가 되는 길은 출세의 길이였다.

룩소 시내에서 江을 건너면 황야가 펼쳐진다. 척박한 이곳은 키작은 가시나무이외에는 별다른 식물群이 자라지 않는다. 잿빛 시야가 계속된다. 광활함의 끝에 높은 암벽이 병풍처럼 앞을 막는다. 길이 없는 황야는 강에서 멀어질수록 사막으로 깊어간다.
깊은 사막, 그곳은 죽음으로 이끄는 곳이다. 바로 그곳이 죽음의 都市가 뜨거운 바람에 밀려오는 모래에 덮여있다. 무덤의 도시 귀족들 제사장들 왕실 가족등 수만의 무덤들이 모영 永生의 꿈을 꾸고 언젠가 깨어날때를 기다리는 곳이다. 살아 있는 것이 없는 황야에 바람이 분다. 을씨년스럽다. 혼자 떠도는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특히 자료나 역사를 통해 선정한 타깃인 경우 어려움을 뚫고 현장에 도착 했을 때는 「아무것도 없음」 또는 「흔적」이외에는 보이는게 없는 그 스토리에 스스로 취한 경우인데, 본래 여행자의 동기를 부여하는 방법으로 「스토리」化는 매우 중요한 광광지의 요소가 되는 셈이다. 사실 혼자 떠난 여행일정이 10일 이상되면 좀처럼 감동의 판막이란 것이 반응이 적다. 여행초기의 흥분, 예를들어 새로운 사람들, 말, 음식, 옷차림, 잠자리, 교통수단 등이 몇번 반복이 계속되면 슬그머니 감정의 촉수는 무뎌지며 목적지 선정시의 동기를 부여한 「스토리」에만 매달리게 된다. 혼자 떠도는 자유란 것도 일정한 스토리의 연결없이 장기간 여행은 불가하다. 방랑객 유랑객 여행객… 지난밤 「빛과 소리」에 취해 화려한 여름밤의 꿈을 꾸었고 오늘은 죽음의 도시로 향한다. 강을 건너고 나서 작은 식당겸 노새와 자전거를 빌렸다. 그러나 나의 선택은 불행하였다. 내륙성 사막기후의 지열과 기온은 자전거정도의 문명의 利器를 거부했다. 「사막을 건너는 法」이라는 누구의 책구절에 「사막은 자연스럽게 건너야 한다」라는 말이 있었다. 노새 두 마리를 빌렸다. 점심 도시락을 준비했다. 「쉬쉬케밥」(양고기 꼬치구이)을 둥그런 아랍빵 사이에 넣고 길게 만 빵과 통양가죽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웠다. 참 양가죽 물통은 과학적이다. 쉬 뜨거워지지 않고 노새들에게도 자연스럽게 걸쳐진다. 자동차 도로 옆길로 가야한다. 목적지 까지는 20여킬로의 거리, 지도상에는 길과 유목민마을이 있다고 한다. 노새는 끈기 있다. 노새를 타고 우산을 들고 또다른 노새를 끌며 간다. 바람은 햇빛에 한껏 달구어진 모래를 몰고 온다. 피부에 닿는 날카로운 모래의 예각은 뜨껍고 아프다. 일사병을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머리부분을 가려야 한다. 우산은 햇빛을 가리는 최상의 방패이다. 타는 목마름에 조금씩 목을 축이며 여섯시간의 행진 끝에 죽음의 도시에 입성하였다. 행진도중에 빵과 물을 실은 노새가 무단 이탈하는 바람에 10여분 사막을 노새를 끌고 노새를 잡으러 뛰어 다녔다. 잡힌 노새는 나를 우롱하는 표정이었음으로 회초리를 이용한 호된 기합을 먹였다. 죽음의 도시를 지키고 있는 것은 얼굴형체가 망가진 거대한 파라오의 좌상이었다. 지진에 의해 파괴된 파라오 아멘노피스 3세의 흉상인데 죽음의 도시는 해가 보이지 않는 절벽의 암굴도시로 암상을 파고 길을 만들고, 영원히 쉬는 집을 만든 거대한 돌산 속에 있었다. 그동안 나일江 주변을 돌아다니며 머리속에 담겨있는 話頭는 수천년 보통사람들의 사는 형태, 일자리, 사랑, 믿음같은 것과 세상을 다스리는 군주와 노예, 남성과 여성, 군주와 제사장, 삶과 죽음같은 명제가 되지 않는 언뜻 떠오르는 「막연함」이었다. 죽음의 都市는 장례의식을 위한 장제전(葬祭殿)을 중심으로 협곡을 따라 구획별로 나뉘어 있다. 「여왕들의 계곡」이라 불리는 현재 지명으로 「하부」에는 80여개소의 여왕과 공주등의 무덤이 산재한다. 아쉽게도 도굴꾼에 의해 오래전부터 훼손 당하여 부장품들이 흔치 않고 미이라도 발견된 예는 드므나 묘혈번호 55번인 20대 아몬헤르호페세프, 현실주의의 아름다운 벽화가 여행자의 힘든 땀을 보상한다. 밝은 군청색과 노랑색이 선명한 귀부인들의 모습, 사실화적인 균형,색체감, 특히 얼굴부분의 화장(化粧) 색도와 눈가의 마스카라등은 1993년 8월 현재, 젊은 여성들이 강조하는 화장포인트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 또한 66번 라메스 2세의 부인인 네페타리 현실의 그림은 평면이 아닌 요철로 깍아 채색한 상형문자와 풍속도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죽음의 都市 다른 구획은 파라오의 재상들과 신하들의 무덤群이다. 수백개의 묘혈중에 벽화의 상태가 잘 보존된 1번, 3백59번 돌을 넘나 들었다. 이 지역 특권층의 생활상을 점칠 수 있는 벽화에서 특이한 부분은 젊은 부부가 다정히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다. 당시 풍속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운데 남존여비의 공자님 그늘에 사는 사람들 관습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광경이다. 고대 농경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중시하고 이후 여성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하고 여성파라오까지 등장하여 여성의 지위향상에 관한한 古代 이집트는 인류사에서 가장 선진국인 셈인데 일반 농민까지 부부동반형 조각 풍속도등이 구체적 근거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도시속에 왕들의 계곡은 오랫동안 이야기로만 떠돌았다. 수십명의 파라오들이 온갖 금은보화를 안고 잠을 자고 있는 곳이 사막 어딘가 암벽속에 있다.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사막을 건너야 한다. 사막에선 죽음의 사신이 기다린다. 「왕들의 계곡」이라고 불리워진 이 도시는 가장 오랫동안 감추어진 곳이다. 초기의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의 형태가 중앙조 시기에 바뀌면서 암굴을 깊히 파고 파라오의 미이라를 보관하는 형태로 바뀐다. 초기의 피라미드 건축이후부터 현실안에 놓인 부장품을 노리는 도굴꾼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 왔는데 암굴을 깊게파고 미로를 만들고 입구를 봉하고 현실공사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을 살해하는등 현실의 미이라를 보존하기 위한 온갖 노력들이 세월이 흐르며 수포로 돌아간다. 「잠자는 왕」을 찾기 위한 도굴꾼들의 노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어서 이후 발굴단으 작업시에 미로에서 발견되는 수천년전 유골은 「도굴꾼」임에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 계곡에는 지금까지 확인된 62개의 신왕조시대의 파라오의 분묘군들이 확인되었으나 대부분 도굴 당하였다. 이 죽음의 도시가 오랫동안 잠을 깨고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 스웨즈운하의 개통과 함께 유럽인들의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독일인 「보르그시」가 암굴 하나에서 23개의 왕의 미이라를 발견하기도 하였으나 매우 훼손되어 있었고 부장품은 이미 도굴꾼의 손에 넘어가 버린 뒤였다. 지금도 세계 유수의 골동품 경매장에서 이런 부장품들은 방황하고 있다. 도굴꾼의 도전을 면해 원형 그대로 발견된 소년왕 투탄카멘의 묘는 묘인부들의 오두막집 밑에 묻혀있어서 기적적으로 수난을 면한 경우였다.
카이로의 「라메스」역에서 밤기차를 탔다. 가난한 여행자에게 밤기차는 하룻밤 평온한 잠자리 뿐만아니라 열은 잠에서 깰때마다 가고 싶은 「그곳」에 더욱 가까워지는구나 하는 묘한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이 밤을 넘기면 기차가 끝내 멈추는 곳은 지금부터 4천년전 역사의 무대이다. 古代 이집트 문명에 대해 그리이스 학자들의 연구열은 가히 외경에 가까웠다. 극작가 호메루스는 이곳을 백개의 문(門)을 가진 首都라고 칭송했다.「테베」. 고대 이집트 중왕국(BC2050-1800)의 수도. 현지 지명으로는 룩소. 세상어느 곳이나 밤역 앞은 불이 켜져있다. 아직 해가 뜨지않은 역광장 주위로 유난히 밝은 백열등을 켜고 작은 식당들이 기다린다.풀냄새나는 따뜻한 양젖과 「훕즈」라고 불리우는 직경이 30센티가 되는 아랍빵, 삶은 검정콩에 넉넉한 올리브 기름, 몇조각의 양파와 소금에 절인 올리브, 레몬조각, 오랜만에 정식으로 아침을 복용하였다.
친절한 주인장이 「하쉬쉬」를 권한다. 아마(亞麻)의 최대 경작지인 나일강 유역은 대마초의 천국이다. 누구나 쉽게 구하고 실행에 옮긴다. 역근처에 민박을 정하고 아침포함 5파운드, 자전거 빌리는데 하루에 5파운드, 코닥필름 24커트가 9파운드이다. 셔터를 아껴야 한다. 그동안 멤피스에 도읍을 정하고 부흥과 안정속에서 나일강의 이집트는 BC 2000년경에 상이집트 지역 테베에 새로운 파라오를 탄생시킨다. 그간 나일강의 관개공사를 성공하고 경제적 안정속에, 또한 지리적인 이점을 안고 일찍 통일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으나 점차 강변국가의 지방 할거성(割據性)으로 중앙집권이 약화되고 귀족들의 제후(諸侯)화 되는 체제가 이루어 진다. 특히 현인신(現人神) 파라오의 神性을 유지시켜 주는 제사장 세력이 부상하여 부와 권력을 지닌 계층으로 자리 잡게 되는 셈이다. 신화는 가끔 정치적 동기에서 꾸며질때가 있다. 파라오의 혈통이 신성하고 지배권 또한 神으로부터 계승되었다는 신화는 나일강의 혜택으로 사는 소박한 농민들에게는 효과적이 었을 것이다. 초기의 태양신 「레」를 신봉하던 제사장들은 이후 수도를 테베로 옮기며 국가神을 아몬레(태양의 화전)로 정한다. 「아몬」은 「테베」의 사람들이 본래 믿던 부족神이었다. 이시기에 파라오의 神性과 통치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록들이 있다. 파라오가 그의 통치권을 이을 이들에게 남긴 「파라오의 교훈」이라는 글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희는 제사장들과 가신(家臣) 전부를 경계하라. 혼자서는 그들을 만나지 말라. 그리고 더욱 중히 여길 것은 친구를 만들지 말라. 잠들때에는 스스로 심장을 지켜라. 특히 재앙(災殃)이 있는 날엔 자기편이 없다고 생각하고 홀로 결정하라.」 고독한 파라오의 심정을 토론한 이런 구절은 神格化된 인간의 적나라한 고뇌를 보여주는 것으로 파라오의 자리가 얼마나 힘든 자리 인가를 엿볼 수 있다. 둘레가 4Km가 넘는 카낙신전지구는 테베의 수호신이며 주신인 아멘데(태양의 회전)을 봉헌하기 위한 대신전 단지이다. 토토메스 3세가 조영한 이 신전은 지금도 여름밤에 한차례 세계의 이목을 끄는 거창한 이벤트로 유명하다. 다름아닌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공연무대가 되는 곳으로, 세계의 내로라하는 상류사회 인사들이 화려한 역사의 현장을 무대로한 「한 여름밤의 꿈」을 꾸기위해 찾아온다. 화려한 파라오의 무대는 그들의 1년 스케줄에 반드시 끼는 중요행사이다. 이 카낙 신전은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는 곳으로 파라오의 행적, 조상(彫像)들이 건축물의 벽면에 부조되어 있다. 상형문자로 뒤덮인 이 거대한 신전지구는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인 셈인데, 직경이 5m가 넘는 거대한 기둥, 오베리스크가 수천년의 비바람을 견디고 서있다. 다른 오베리스크는 파리의 상제리제에서 개선문을 마주보고 있다. 거대한 건축물을 볼때마다 느껴지는 것이 있다. 엄청난 규모와 기술적인 성취에 대한 경탄, 그러나 그 완성이 지닌 노예 노동의 상징성, 수 만명의 인간들이 신격(神格)화된 통치자에게 눌려 권력에 대해 절대적인 봉사를 강요 당하지는 않았는지? 그러나 이런 실상은 이집트 고대 유적지에서는 부당 하였다. 노동에 따른 확실한 임금규정이 적힌 기록들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며 어쩌면 이런 국가적 대역사가 국민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주는 공공사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역전이다. 그 근거가 공개적이며 누구나 볼 수 있는 상형문자로 신전벽에 부조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밤에 유적지를 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새로운 경험이다. 나의 여행에 처음 겪는 밤의 유적지 탐험이었다. 그 밤은 황홀하였다. 「빛과 소리」로 역사를 조명하는 방법, 유적지를 새롭게 보고 느끼게 하는 이벤트, 카낙신전 지역을 무대로 하여 이루어진 이「빛과 소리」의 연출은 한 여름밤의 아름다운 짧은 꿈처럼 감동의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여행자의 가슴에 깊은 낙인을 박아 놓는다. 그 비수에는 「여수(旅愁)」라는 성분의 독약을 뿌려두었는지…. 여행자들에게 상사의 날개를 달아준 이「빛과 소리」의 구성은 이러하다. 주연은 빛과 소리, 무대는 카낙신전지구, 시나리오는 카낙신전지구를 조영한 파라오의 그 치적, 관객들은 이동한다. 첫 무대는 카낙의 입구, 수십명의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영어?불어등으로 구룹을 나눈다. 막이 오르는 대신 출력이 큰 엠프가 「소리」를 울린다. 카낙신전을 방문해주신 여러분을 환영한다. 이 지구의 수호신은 아멘이다. 토토메스 3세가 봉헌한 이 신전은…아직「빛」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야기 소리가 배경을 둔 건축에 일루미네이션(조명)이 하나 둘 켜지며 이야기 줄거리에 따라 색조가 바꿔진다. 불이 꺼지고 다시 소리가 들리고 색깔섞인 불빛이 이야기를 조명한다. 다음 무대를 위해 관객들의 발걸음이 옮겨지고 「빛과 소리」라는 마력에 끌린 듯 카낙 신전지구를 돌아보는 것이다. 이 유적지를 무대로 한 연출은 보고 듣고 이해를 하기 위한 정말 빼어난 한 여름밤의 이벤트 였다. 밤새 이야기와 불빛과 소리에 취했다. 유적관광지에서의 역사를 재생하는 연출중에 「빛과 소리」는 아름다운 방법이다. 역사의 가치가 있는 유물을 예술적 감동까지 이끌수 있다면 성공한 관광지가 되는 셈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연출이 반드시 따라야 된다. 방문객에게 파는 것은 幻想이며 관광상품은 「분위기」란 포장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룩소 시내에서 江을 건너면 황야가 펼쳐진다. 척박한 이곳은 키작은 가시나무이외에는 별다른 식물群이 자라지 않는다. 잿빛 시야가 계속된다. 광활함의 끝에 높은 암벽이 병풍처럼 앞을 막는다. 길이 없는 황야는 강에서 멀어질수록 사막으로 깊어간다. 깊은 사막, 그곳은 죽음으로 이끄는 곳이다.
바로 그곳이 죽음의 都市가 뜨거운 바람에 밀려오는 모래에 덮여있다. 무덤의 도시 귀족들 제사장들 왕실 가족등 수만의 무덤들이 모영 永生의 꿈을 꾸고 언젠가 깨어날때를 기다리는 곳이다. 살아 있는 것이 없는 황야에 바람이 분다. 을씨년스럽다. 혼자 떠도는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특히 자료나 역사를 통해 선정한 타깃인 경우 어려움을 뚫고 현장에 도착 했을 때는 「아무것도 없음」 또는 「흔적」이외에는 보이는게 없는 그 스토리에 스스로 취한 경우인데, 본래 여행자의 동기를 부여하는 방법으로 「스토리」化는 매우 중요한 광광지의 요소가 되는 셈이다. 사실 혼자 떠난 여행일정이 10일 이상되면 좀처럼 감동의 판막이란 것이 반응이 적다. 여행초기의 흥분, 예를들어 새로운 사람들, 말, 음식, 옷차림, 잠자리, 교통수단 등이 몇번 반복이 계속되면 슬그머니 감정의 촉수는 무뎌지며 목적지 선정시의 동기를 부여한 「스토리」에만 매달리게 된다. 혼자 떠도는 자유란 것도 일정한 스토리의 연결없이 장기간 여행은 불가하다. 방랑객 유랑객 여행객… 지난밤 「빛과 소리」에 취해 화려한 여름밤의 꿈을 꾸었고 오늘은 죽음의 도시로 향한다. 강을 건너고 나서 작은 식당겸 노새와 자전거를 빌렸다. 그러나 나의 선택은 불행하였다. 내륙성 사막기후의 지열과 기온은 자전거정도의 문명의 利器를 거부했다. 「사막을 건너는 法」이라는 누구의 책구절에 「사막은 자연스럽게 건너야 한다」라는 말이 있었다. 노새 두 마리를 빌렸다. 점심 도시락을 준비했다. 「쉬쉬케밥」(양고기 꼬치구이)을 둥그런 아랍빵 사이에 넣고 길게 만 빵과 통양가죽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웠다. 참 양가죽 물통은 과학적이다. 쉬 뜨거워지지 않고 노새들에게도 자연스럽게 걸쳐진다. 자동차 도로 옆길로 가야한다. 목적지 까지는 20여킬로의 거리, 지도상에는 길과 유목민마을이 있다고 한다. 노새는 끈기 있다. 노새를 타고 우산을 들고 또다른 노새를 끌며 간다. 바람은 햇빛에 한껏 달구어진 모래를 몰고 온다. 피부에 닿는 날카로운 모래의 예각은 뜨껍고 아프다. 일사병을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머리부분을 가려야 한다. 우산은 햇빛을 가리는 최상의 방패이다. 타는 목마름에 조금씩 목을 축이며 여섯시간의 행진 끝에 죽음의 도시에 입성하였다. 행진도중에 빵과 물을 실은 노새가 무단 이탈하는 바람에 10여분 사막을 노새를 끌고 노새를 잡으러 뛰어 다녔다. 잡힌 노새는 나를 우롱하는 표정이었음으로 회초리를 이용한 호된 기합을 먹였다. 죽음의 도시를 지키고 있는 것은 얼굴형체가 망가진 거대한 파라오의 좌상이었다. 지진에 의해 파괴된 파라오 아멘노피스 3세의 흉상인데 죽음의 도시는 해가 보이지 않는 절벽의 암굴도시로 암상을 파고 길을 만들고, 영원히 쉬는 집을 만든 거대한 돌산 속에 있었다. 그동안 나일江 주변을 돌아다니며 머리속에 담겨있는 話頭는 수천년 보통사람들의 사는 형태, 일자리, 사랑, 믿음같은 것과 세상을 다스리는 군주와 노예, 남성과 여성, 군주와 제사장, 삶과 죽음같은 명제가 되지 않는 언뜻 떠오르는 「막연함」이었다. 죽음의 都市는 장례의식을 위한 장제전(葬祭殿)을 중심으로 협곡을 따라 구획별로 나뉘어 있다. 「여왕들의 계곡」이라 불리는 현재 지명으로 「하부」에는 80여개소의 여왕과 공주등의 무덤이 산재한다. 아쉽게도 도굴꾼에 의해 오래전부터 훼손 당하여 부장품들이 흔치 않고 미이라도 발견된 예는 드므나 묘혈번호 55번인 20대 아몬헤르호페세프, 현실주의의 아름다운 벽화가 여행자의 힘든 땀을 보상한다. 밝은 군청색과 노랑색이 선명한 귀부인들의 모습, 사실화적인 균형,색체감, 특히 얼굴부분의 화장(化粧) 색도와 눈가의 마스카라등은 1993년 8월 현재, 젊은 여성들이 강조하는 화장포인트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 또한 66번 라메스 2세의 부인인 네페타리 현실의 그림은 평면이 아닌 요철로 깍아 채색한 상형문자와 풍속도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죽음의 都市 다른 구획은 파라오의 재상들과 신하들의 무덤群이다. 수백개의 묘혈중에 벽화의 상태가 잘 보존된 1번, 3백59번 돌을 넘나 들었다. 이 지역 특권층의 생활상을 점칠 수 있는 벽화에서 특이한 부분은 젊은 부부가 다정히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다. 당시 풍속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운데 남존여비의 공자님 그늘에 사는 사람들 관습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광경이다. 고대 농경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중시하고 이후 여성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하고 여성파라오까지 등장하여 여성의 지위향상에 관한한 古代 이집트는 인류사에서 가장 선진국인 셈인데 일반 농민까지 부부동반형 조각 풍속도등이 구체적 근거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도시속에 왕들의 계곡은 오랫동안 이야기로만 떠돌았다. 수십명의 파라오들이 온갖 금은보화를 안고 잠을 자고 있는 곳이 사막 어딘가 암벽속에 있다.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사막을 건너야 한다. 사막에선 죽음의 사신이 기다린다. 「왕들의 계곡」이라고 불리워진 이 도시는 가장 오랫동안 감추어진 곳이다. 초기의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의 형태가 중앙조 시기에 바뀌면서 암굴을 깊히 파고 파라오의 미이라를 보관하는 형태로 바뀐다. 초기의 피라미드 건축이후부터 현실안에 놓인 부장품을 노리는 도굴꾼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 왔는데 암굴을 깊게파고 미로를 만들고 입구를 봉하고 현실공사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을 살해하는등 현실의 미이라를 보존하기 위한 온갖 노력들이 세월이 흐르며 수포로 돌아간다. 「잠자는 왕」을 찾기 위한 도굴꾼들의 노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어서 이후 발굴단으 작업시에 미로에서 발견되는 수천년전 유골은 「도굴꾼」임에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 계곡에는 지금까지 확인된 62개의 신왕조시대의 파라오의 분묘군들이 확인되었으나 대부분 도굴 당하였다. 이 죽음의 도시가 오랫동안 잠을 깨고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 스웨즈운하의 개통과 함께 유럽인들의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독일인 「보르그시」가 암굴 하나에서 23개의 왕의 미이라를 발견하기도 하였으나 매우 훼손되어 있었고 부장품은 이미 도굴꾼의 손에 넘어가 버린 뒤였다. 지금도 세계 유수의 골동품 경매장에서 이런 부장품들은 방황하고 있다. 도굴꾼의 도전을 면해 원형 그대로 발견된 소년왕 투탄카멘의 묘는 묘인부들의 오두막집 밑에 묻혀있어서 기적적으로 수난을 면한 경우였다.

룩소를 관통하여 흐르는 나일江을 가운데에 두고 동쪽으로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삶을 살고 서쪽은 죽은이들이 영원한 삶을 기다리며 잔다. 이런 그들 사고의 對位는 강이 주는 수확과 풍요의 생명성과 사막이 주는 미지의 공포와 죽음과 뚜렷한 대칭을 그렸다.세계를 흔들었던 역사적 주인공의 자취를 들춰보는 호기심 그리고 그의 실체를 느낄 수 있는 예정된 감동을 안고 나는 걷고 있다. 황무지가 끝나는 곳에 사막, 멀리서 보이는 절벽의 城砦들이 점점 뚜렷해지면서도 입구는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몇번의 굴곡을 따른 뒤 감추어진 입구는 최근에야 넓힌 것으로 외부에서는 시야를 가린다.
드디어 왕들의 계곡에 빠져들었다. 여는 아랍국가들처럼 낮 예배가 끝나는 시간은 점심시간이며 오후 예배시간 전까지는 낮잠자는 시간이다. 매표소 문지기는 입장료만 받고 문을 닫는다. 분지형이며 타원형 협곡, 둘레는 높은 절벽으로 병풍을 두른 지형으로 출입로를 막으면 천연적 요새인 셈이어서 외부로부터 출입이 불가능한 지세이다. 둥근 주위를 돌아가며 파라오들이 오랜 잠을 자던 장려한 분묘群들이 놓여 있다. 60여 임금들이 굴무덤, 오른쪽부터 순서대로 번호가 주어진다. 침몰한 보물선이 風聞처럼 파라오들의 미이라가 나일江의 범람을 피하고 입구가 봉함된 상태로 금은보화를 안고 사막 어딘가에 묻혀 있다고 오랫동안 소문으로 떠돌았다. 해양의 거대한 풍랑만큼이나 사막의 모래폭풍은 무섭다. 이 폭풍은 모든 것을 묻혀 버린다. 하룻밤을 지새고 나면 그림처럼 새로운 모래산들이 생기고 그 형체는 다시 바람에 따라 흩어졌다가 새로운 형태로 떠오른다. 거대한 모래산이 몇시간내에 도화지의 그림산처럼 바람의 지우개로 쉬 지워 버린다. 바람부는 사막에 나섬은 죽음의 길이다. 낙타는 사막의 작은 배이다. 무모한 도둘꾼들이 왕의 계곡을 찾으려고 사막을 건너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의 반복이 계속되고 세월이 흘렀다. 이후 왕들의 계곡이 베일을 벗고 사실로 확인되었을 때 파라오의 금은보화는 이미 그의 손끝을 떠난 후였다. 60여개의 파라오의 현실중에 출입을 허락하고 역사적으로 기억나는 17번 세티1세의 묘를 시작으로 무뢰하게 돌아 다녔다. 절벽을 뚫고 시작되는 입구에서 과히 심하지 않은 경사로를 따라 들어가 암굴 특유의 냄새와 싸늘함을 느끼기 까지 1백 50여m 그곳에 미이라를 안치했던 현실이 있다. 20평 정도의 현실 바닥에는 자갈이 깔려있고 할걸음 두걸음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고 그것은 곧 메아리가 되었다. 관람객을 위한 형광등이 공포감을 막아주기는 했으나 내 발자국 소리는 서라운드 스피커에서 방향없이 내뿜는 소리처럼 너무 크다. 본래 입구에서 현실에 닿기까지는 온갖 지략과 최대의 기술로 미로와 함정을 만들어 놓았던 기록이 있고, 그래서 체감온도는 서늘하다. 세티 1세의 현실. 부장품을 쌓아 두었던 부속실등은 본래 내부의 부장품들이 도굴꾼들의 손에 넘어가 지금은 런던박물관에 정중히 모셔져 있다. 침략과 노략, 해외원정군들의 수입, 「이기면 얻으리라.」 텅빈 현실과 부속실을 보며 주마등같이 떠오른 생각들. 세티의 현실에서 보여주는 것은 3천년 이후에도 퇴색하지 않고 생생하게 색들이 살아 있는 벽화들이다. 변하지 않는 색, 파라오의 생전의 생각, 「그가 내세에 들어설 때 그를 맞는 새로운 세상은 아름답고 즐거움이 가득하리라」는 바로 그 생각이 그려져 있다. 검정색바탕에 황금색의 주는 장중함, 세밀한 상형문자. 이어서 11번 라메스 3세. 그의 제위때에는 사상 최초의 민중반란을 겪었다. 일종의 인플레가 동기가 되는데 수확된 곡식값은 올랐어도 농민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허덕인다. 관리들의 부정과 농간, 농민들의 봉기. 군왕아래의 太平樂土의 기준은 굶주리는 백성이 없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회였다. 정상적인 관람시간에는 안내자의 안내를 받고 현실내부를 볼 수 있었으나 마침 오수를 즐기려는 안내자는 그룹이 아니어서 안내료 수입이 나혼자 뿐이었으므로 혼자 돌아다니려면 다니라는 듯 기회를 줬다. 사진의 기록성… 욕심. 어느 옥외 유적지마다 사진촬영은 가능하였으나 옥내인 경우에는 제약이 따른다. 사진촬영을 허가하나 여행자로서는 거금인 사진촬영료를 따로 받았다.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경우 조악한 포스트카드라도 사야만 한다. 눈으로 보이는 것들을 기억으로 남길 수 있는 한계. 여행을 마친후의 그 기억들의 소생을 위한 방법. 결국 남겨지는 것은 사진들. 뷰파인더를 통해 구도를 그리며 보는 사물은 더욱 새롭다. 셔터의 절제를 잃고 비상용 필픔, 플래시용 전지가 모두 소비된 후 무려 예상된 여행경비의 5일분이나 소모할 정도로 셔터를 눌렀다. 사진이 보여주는 재생과 기록. 충격과 신비감으로 충만한 이 왕들의 계곡을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나서 인화지에 像이 잡히면서 떠오르는 실체, 점점 본 것에 대한 실감을 잃을 것 같은 조바심에서 셔터를 누른 경우였다.

한 때 내 여행의 궤적은 패키지 투어에 끼어서 잘 알려진 관광명소를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찍는 등 방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예정된 일정에 맞추어 경유하는 식의 「관광객의 수박 겉핥기관광」이 아닌 여행자로서의 자유, 이를테면 목적지를 정하고 둘러보다가 좋으면 며칠 더 묵는 고정되지 않은 자유, 관광객과 여행자의 개념은 이렇게 확연히 다른 것이다. 왕들의 계곡에서의 탐험은 사진찍기로 매우 들뜬 상태였다. 찍힌 것들은 모두 내소유가 되는 욕심으로 오늘과 같은 기회를 만들기 위해 내일 다시 이 시간을 맞춰야 한다. 계곡초입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였다. 잠자리 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마실 것을 사며 주인의 소개를 받으면 된다. 양치기를 업으로 하는 집주인은 나와 나이가 별로 없는데도 노인 티가 난다. 수염을 기르고 조혼한 탓인가. 그러나 사막에 사는 유목민의 제일덕목인 「환대」에 대해서는 기본이 되어 있다. 나일江변의 무성한 갈대로 지붕을 엮은 토담집, 갈대로 그물처럼 만든 침상, 흙벽 커다란 물항아리, 면화로 짠 깔개가 전부인 방 한칸, 보통 집의 구조는 口字형인 작은 城이다. 한국손님을 맞는 준비가 부산하다. 흙벽인 방의 청소는 먼지터는 것이 아니다. 우물물을 퍼서 방 안 골고루 뿌려주고 물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준다. 건조한 사막에서 최상의 밤을 지새우기 위한 자동습도조절장치인 셈이다. 특히 일교차가 극심한 곳이라 새벽녘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는 양가죽을 얼기 설기 엮은 담요가 꼭 필요하다. 사막마을의 밤은 참 신비롭다. 유난히 밝고 커다란 달과 별들이 초롱초롱 반짝인다. 야자수와 가끔은 유도화가 꽃을 피운다. 밤에도 보인다. 사막에 안개가 피어오르고 달이 뜬다. 바닥은 보이지 않고 어깨까지 차 오른 안개, 그리고 비추는 달, 무한대의 꿈과 상상의 날개가 훨훨 날아다니듯, 그날 밤 나는 사막, 달밤, 안개 속에서 날개 짓 하듯 두팔을 저으며 한참 돌아다녔다. 사막, 그곳에는 그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경험한 후의 상상이란 정말 보잘것이 없다. 나일江을 따라서 벌써 60여일 간을 떠돌고 있다. 江과 사람들. 역사와 현실이 뒤죽 박죽된 역사의 시차로 어지럽다. 유적지 탐험에서 겪는 감정의 굴절은 극심한 것이다. 수 천년전 세계에서 가장 융성했던 나라. 그러나 그 영광을 지키기에는 어려운 역사의 굴곡과 현실이 존재한다.
렇다. 百聞이 不如一見이라고, 보고 느끼는 것 만큼 내 비교의 폭은 넓어지리라 스스로 격려하며 행적을 정하는 나의 여행궤적은 점점 오지의 드문 여행자로 뚜렷이 변모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여행자들이 몰려 오는 곳. 역사적 사실로서의 흔적 그리고 그 배경을 스토리화하는 것이 성공한 유적관광지가 된다는 사고의 틀이 좁혀지게 됨은 다행한 일이다. 나일江 주변의 탐험에서 마지막 타깃은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중 하나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였다. 다시한번 「세계의…」수식어에 현혹당한 경우였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의 古代를 흘려보내고 지중해의 패권을 잡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딴 도시이다. BC 4세기경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아프리카의 빛으로 불리웠으며, 또한 한때 지중해 연안 항구로서는 최대규모 였다. 이집트 문명을 스승으로 삼고 지중해의 패권이 곧 세계의 패권과 일치한 시기에 이집트문화의 토양이 아닌 그리이스 식민지로서의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에서 만난 역사의 영욕과 배반감을 느끼게 하는 도시이다. 이런 느낌은 戰勝國이나 식민주의자들이 勝利品을 뺏어다 자기나라의 큰 광장에 세워 놓는다든지 점령지에 자기네 식의 건축물을 세운 것을 볼 때 느끼는 감정과 흡사하다. 식민지로서의 유적. 시간대를 뛰어넘는 이집트속의 그리이스 흔적을 살펴보면서 쓸쓸한 역사의 영욕을 느끼게 됨은 당연한 것이겠으나 이집트 古代문명이 찬란함에 대한 충격과 감동이 완충도 없이 전락한 알렉산드리아속의 그리이스는 이미 지난역사를 오버랩한 순환의 흔적이었으므로 당혹스러웠다. 타깃은 등대터. 그곳은 해변을 따라 긴 방파제의 끝에 별로 진열품이 없는 지중해 근해의 魚類들을 수족관에 담아 해양박물관으로 개축해 버려 「아프리카의 등불」이었던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중 하나인 파로스의 등대터는 그냥 흔적과 기록만 남아있는 허구였다. 나의 경험적 여행수칙에 또하나 낙인이 찍힌다. 이집트를 보고나서 계속해서 그리이스에는 가지말 것, 그것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본 후에 한라산 바다기슭 천제연폭포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과 같은 것이므로. 그러나 미덕이 되는 동네에서는 입을 다물어야 된다. 古都 알렉산드리아는 한때 유럽문화의 원류가 되는 헬레니즘문화의 중심지이며 그래서 원형극장, 그레코 로만 박물관이 방문객을 맞는 소위 관광명소였으므로 등대터를 둘러보고 나서 바닷가 근처의 낡은 펜션에 몸을 눕히고 며칠동안 지중해를 바라보며 무한 경이, 유구함과 같은 이집트 여행에서의 충격을 반추하면서 며칠을 보내기로 했다. 지중해를 접한 유럽지역이나 아프리카지역 아랍지역에선 모래밭이 있으면 해변관광지로 명성을 갖는다. 그러나 모래밭을 지닌 지중해 연안의 도시는 몇되지 않느다. 지중해성 기후의 온화함과 함께 낯익은 협죽도가 모래밭 주위에 꽃을 피우고, 그해에도 우리나라 안 소식은 나라밖에서 더욱 소상하게 알수 있었다. 나일江 유역의 탐험을 끝낸 다음 행선지는 아테네 였고 파행이였다.